수천억 추가 부담 내몰리자 '강수'
한국전력이 그동안 비공개를 고수해왔던 용도별 전기요금 원가를 공개하겠다는 뜻을 처음으로 밝혔다. 탈(脫)원전에 이어 정부의 전기요금 개편으로 경영부담이 더 커지게 되자 이참에 왜곡된 전기요금 체계를 공개해 개선을 위한 공론화를 유도하겠다는 취지다. 그동안 한전과 원가 공개 문제를 협의해왔던 정부는 이날 한전의 깜짝 발표에 당황해하는 분위기다.

권기보 한국전력 영업본부장은 11일 산업통상자원부와 한전이 서울 세종대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연 ‘주택용 전기요금 개편’ 공청회에서 “이르면 올 하반기부터 전기요금의 원가 구성내역을 전기료 청구서에 상세하게 밝히겠다”고 했다.

이날 공청회는 지난 3일 정부가 공개한 △7~8월 누진구간 확대(1안) △7~8월 누진단계 2단계로 축소(2안) △누진제 완전 폐지(3안) 등 세 가지 안에 대한 여론을 듣기 위해 마련됐다. 공청회에선 정부가 소비자 측 대표로 섭외한 시민단체 소속 패널이 잇달아 정부·여당이 선호하는 1안에 힘을 싣는 발언을 이어갔다. 1안은 최대한 많은 가구의 전기요금을 깎아주는 방안으로, 이를 채택하면 한전은 2536억~2847억원의 추가 부담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정부가 이날 공론회 분위기를 1안으로 몰고가면서 채택 가능성은 한층 커졌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전력이 11일 서울 세종대로 프레스센터에서 연 ‘주택용 전기요금 개편’ 공청회에서 패널들이 토론하고 있다.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전력이 11일 서울 세종대로 프레스센터에서 연 ‘주택용 전기요금 개편’ 공청회에서 패널들이 토론하고 있다.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정부안 편든 소비자 단체들

이날 공청회에서 소비자 측 대표로 참석한 패널들은 잇달아 1안에 힘을 실었다. 송보경 E컨슈머 대표는 “1안은 전기요금의 예측가능성을 높여 현행 체제의 불안 요소를 해소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인례 녹색소비자연대 공동대표도 “최대한 많은 가구에 전기요금 혜택을 주는 게 합리적”이라며 “1안이 가장 적합하다”고 했다.

1안은 수혜 대상이 가장 많아 정부와 여당이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600만여 가구에 여름마다 요금 인하 혜택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누진제를 폐지하는 내용의 3안이 채택되면 전력을 많이 쓰는 887만 가구가 월 평균 9951원씩 할인 혜택을 받는 대신에 저소비층인 1416만 가구는 4335원씩 더 내야 한다.

토론 패널로 참석한 강승진 한국산업기술대 교수는 “여론 부담 때문에 정부는 1안을 택할 것”이라며 “과거 누진제 폐지를 검토할 때마다 ‘부자감세’ 논란이 발목을 잡았는데 선거를 앞두고 정부가 3안을 고르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누진제 태스크포스(TF) 위원장을 맡은 박종배 건국대 전기공학과 교수는 “3안은 전기를 많이 사용할수록 큰 편익이 간다는 점에서 정부에 상당한 부담”이라고 말했다.
脫원전 적자에 전기료 인하까지…한전 "왜곡된 원가체계 밝힐 것"

한전 “올 하반기부터 공급원가 공개”

권 본부장은 이날 “공개할 수 있는 건 되도록 다 공개할 것”이라며 이르면 올 하반기 전기요금 원가를 공개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한전은 그동안 전기요금 총괄 원가는 공개했지만 주택용 산업용 교육용 등 용도별(계약 종별) 원가는 ‘영업비밀’이라며 숨겨왔다. 주요 선진국 중에도 전기요금의 용도별 원가까지 공개하는 국가는 거의 없다.

하지만 한전이 경영 악화로 한계에 몰리게 되자 이날 전면 공개라는 ‘강수’를 던진 것으로 해석된다. 권 본부장은 3일 토론회에서도 “원전 가동률을 급격하게 늘리지 않는 한 당분간 한전 재무상황이 좋지 않을 것이라 누진제 개편을 두고 한전 안팎의 우려가 많다”고 말했다.

한전 소액주주들은 정부가 장기적인 전력 수급 대책 없이 요금부터 깎아주는 ‘포퓰리즘’ 행보를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1~2안이 채택되면 한전은 최대 1911억~2985억원의 추가 부담을 져야 한다. 환경단체들도 요금 할인이 전기의 과도한 사용을 부추겨 재정 부담을 가중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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