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트크라이슬러(FCA)가 르노에 대한 합병 제안을 전격 철회했다. 르노의 최대주주인 프랑스 정부가 구조조정을 우려한 르노 노동조합의 반대 탓에 미온적으로 나온 데다, 르노의 기존 동맹인 닛산도 사실상 반대했기 때문이다. 세계 자동차 시장을 뒤흔들 것으로 예상됐던 합병 추진이 열흘여 만에 물거품됐다.

FCA는 5일(현지시간) 성명을 통해 르노와의 합병을 추진하지 않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는 르노 이사회가 이날 프랑스 정부 요구로 합병 표결을 연기하기로 한 직후 나왔다. FCA는 “합병 제안이 모든 당사자에게 균형적이고 유익하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면서도 “프랑스 내 정치적 상황을 볼 때 합병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확해졌다”고 설명했다.

FCA는 지난달 26일 르노 측에 지분을 50%씩 갖는 회사로 합병하자고 제안했다. 합병이 성사됐다면 폭스바겐, 도요타에 이어 연간 생산 대수 870만 대 규모의 세계 3위 자동차 회사가 탄생할 수 있었다.

FCA가 합병 제안을 철회한 배경으로는 두 가지 요인이 지목된다. 우선 르노 노조 반대로 인해 최대주주(지분 15%)인 프랑스 정부가 유보적 의견으로 돌아섰다. 브뤼노 르메르 프랑스 재정경제부 장관은 이날 “시간을 갖고 일을 처리하자”며 “서둘러 합병에 뛰어들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당초 합병의 목적은 전기자동차와 자율주행차 부상에 따른 매출 감소 및 투자비 증가에 대처하기 위해 규모를 키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르노 노조는 일자리 감소를 우려해 이번 합병이 르노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FCA만 구제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프랑스 정부는 △자국 내 르노 공장과 일자리 유지 △합병 후 이사회 자리 보전 △합병사 최고경영자(CEO) 임명에 현재처럼 개입 등을 요구했다.

이런 이유들로 FCA는 양사가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란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FCA 방침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프랑스 정부 개입이 극단적이었다”며 “모든 사안에 확약을 요구해 FCA가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의 불확실성을 가져왔다”고 비판했다.

르노와 20년간 동맹을 유지해온 닛산의 동맹 변경 움직임도 결정적 영향을 줬다. 닛산은 르노와 지식재산권을 공동 소유하고 있어 합병엔 닛산의 참여가 필수적이었다. 프랑스 정부가 르노-닛산-미쓰비시 연대가 합병 후에도 지속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건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사이카와 히로토 닛산 사장은 지난 3일 “(합병 성사 시) 전혀 다른 회사가 된다”며 “르노와 FCA가 통합할 경우 닛산과 르노 양사의 관계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뉴욕=김현석 특파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