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계가 중대재해 발생 사업장에 대한 작업중지 명령 기준을 구체화해달라고 정부에 호소했다. 기업들은 작업중지 기준이 모호해 툭하면 공장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한국경영자총협회와 대한상공회의소, 중소기업중앙회, 한국중견기업연합회 등 경제 4단체는 3일 고용노동부에 ‘산업안전보건법 시행령 및 시행규칙 개정안에 대한 경영계 의견’을 제출했다.

경영계 "모호한 작업중지 명령 기준 구체화해야…공장 멈췄다가 수천억 손실 날 수도"
경영계가 가장 걱정하는 건 작업중지 남발 가능성이다. 국회는 지난해 12월 산안법 전부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개정안에는 고용부 장관의 작업중지 명령에 대한 근거규정이 포함됐다. 이전에는 법률이 아니라 고용부 지침에 의해 근로감독관이 작업중지 명령을 내렸다. 경총을 비롯한 경제단체들은 올해 초부터 하위법령에 작업중지 명령 기준을 구체화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정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개정된 산안법 하위 법령은 법제처 심사, 규제개혁위원회 심의, 국무회의 의결 등을 거쳐 내년 1월부터 시행된다.

정부가 지난 4월 입법예고를 통해 공개한 시행령 및 시행규칙 초안에는 작업중지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구체적 기준이 빠져 있다. 업종이나 기업마다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세세한 기준을 시행령이나 시행규칙에 포함할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다.

기업들은 구체적인 기준이 없으면 근로감독관 개인 성향이나 여론에 따라 공장 가동중지 여부가 좌우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한 대기업 안전담당 임원은 “기준이 뚜렷하지 않으면 중대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공장을 멈춰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24시간 돌아가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생산라인은 하루만 멈춰도 막대한 손실이 난다.

경영계는 △중대재해가 발생한 작업장에 안전시설이 미비할 때 △사업주가 조치를 취했는데도 위험을 제거하지 못했을 때 △사업주가 즉시 개선조치를 할 수 없어 재해가 재발할 가능성이 큰 경우 △사업주가 개선조치를 하지 않을 때 등에 한해 작업중지 명령을 내려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 감독관이 작업중지 명령을 내리기 전 사업주로부터 의견을 듣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요구했다.

작업중지 명령 해제 절차를 합리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정부안은 사업주가 작업중지 해제 요청을 하면 심의위원회를 열어 4일 이내에 결정하도록 하고 있다. 경영계는 24시간 이내에 작업중지 명령 해제 여부를 가려달라고 요청했다. 경총 관계자는 “작업중지 기간이 하루씩 길어질수록 기업이 입는 피해는 급격히 불어난다”며 “문제가 없다면 최대한 빨리 작업중지를 해제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경영계 요구를 수용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경영계 관계자는 “정부가 입법예고를 통해 초안을 공개한 이후 시행령 및 시행규칙을 크게 바꾼 적은 거의 없다”며 “초안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기업들의 의견을 거의 듣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경총은 지난 3월 산안법 하위법령에 대한 1차 의견서를 고용부에 냈지만, 그 이후 양측은 단 한 차례만 만났다.

도병욱 기자 do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