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1970년대 고도성장기 서울의 빈민촌. 달이 잘 보인다고 해 ‘달동네’라 불렸다.
1960~1970년대 고도성장기 서울의 빈민촌. 달이 잘 보인다고 해 ‘달동네’라 불렸다.
가족과 여성의 전진

고도성장기 사회는 경제와 마찬가지로 격동의 변화를 보였다. 총인구가 1960년 2500만 명에서 1997년 4600만 명으로 늘어나는 사이 도시인구 비중은 42%에서 89%로 증가했다. 도시화와 더불어 가족형태가 크게 바뀌었다. 가족 규모가 1960년 평균 5.5명에서 1990년에는 3.7명으로 줄었다. 한국의 표준적 가족형태는 부부와 성혼한 한 쌍의 자식 부부로 이뤄진 직계가족에서 부부와 미성년 자녀로 구성된 핵가족으로 변모했다.

고도성장에도 '가족주의 틀' 못 벗어…'하면된다' 강조한 새마을운동
가족제와 관련해서는 1961년 군사정부가 단행한 축첩제의 축출이 중요한 진보였다. 남부지역 농촌마을 네 곳에 관한 사회학자 최재석의 조사에 따르면 1950~1960년대에 걸쳐 마을 호수의 8%가 혼외자를 출산한 첩이었다. 익명의 도시에서 첩의 비중은 그보다 더 많았을 터다. 군사정부의 철퇴를 맞아 중앙정부에서 추방된 축첩 공무원은 1385명이나 됐다. 경북에서는 1282명이었다. 이를 계기로 한국사에서 천년 넘게 이어져온 중혼(重婚) 습속이 사회의 공식 영역에서 자취를 감췄다. 중혼의 위협과 모욕으로부터 여성의 인권이 크게 해방됐다.

1962년 민법 개정에 따라 법정분가제가 시행됐다. 차남 이하는 결혼과 더불어 부형의 호에서 의무적으로 독립했다. 개인, 여성, 가족은 오랫동안 그를 억압해온 부계 친족집단으로부터 해방돼갔다. 핵가족의 발달은 개인주의 정신문화의 발전을 자극했다. 여성이 가족과 친족집단의 굴레에서 해방됨에 따라 여성의 사회 진출이 크게 늘었다. 1955년 의사, 교사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여성 수가 남성 100명당 18명에 불과했으나 1990년에는 61명으로 증가했다. 공무원 등 사무직에 종사하는 여성 수도 1955년 남성 100명에 7명이었으나 1990년 52명으로 늘어났다.
농촌의 새마을운동을 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
농촌의 새마을운동을 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
농촌 마을

인간들이 사회생활의 각 영역에서 실천한 신뢰와 협동의 원리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 수준의 진보는 100년 단위로 약간의 변화가 관찰될 정도로 속도가 느리다. 1960년대 농촌사회를 관찰한 몇몇 미국 인류학자는 마을이 공동의 재산, 사업, 신앙으로 뭉친 단체라기보다 친족적 유대와 상호 근접성에서 발생하는 편익의 단위라고 보고했다. 주민 상호 간 협동은 해마다 파트너를 달리하는 품앗이 수준에서 그쳤다. 마을은 선량한 이웃 관계를 해치지 않으려는 전통윤리에 따라 조심스럽게 운영됐다. 마을에서 공공의 영역은 확실치 않으며 공(公)과 사(私)의 구분은 불투명했다.

그런 가운데 일상생활 저변에서는 무관심과 반목과 갈등이 때때로 그 고약한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반상의 신분질서는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었다. 일본인 사회학자가 방문한 전북의 어느 마을에서는 친족집단 간 주종 관계가 1970년대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경기의 어느 마을에서는 수백 년간 마을을 지배해온 양반가의 농사를 위한 하민의 두레가 1970년대까지도 행해졌다. 도시에 나가 성공한 사람은 그의 재산을 조상을 위한 석물과 제각(祭閣)의 조성에 투여했다. 고도성장기는 한국인의 양반화 물결이 마지막으로 일렁인 시기이기도 하다.

유동하는 사회

도시의 급속한 공업화는 대량의 농촌인구를 흡인했다. 대도시 곳곳에는 국유 산지를 침해하면서 대규모 불량주거지가 형성됐다. 한국에선 제3세계의 도시에서 관찰되는 근대적 부문과 단절된 빈민촌은 발달하지 않았다. 급속한 공업화는 풍부한 일자리를 제공했다. 젊은이들은 일정 기간 학업이나 직업훈련을 거친 다음, 공장을 위시한 근대적 부문에 취업했다. 근대적 부문에 취업할 수 없는 장년층은 음식·숙박업, 소매업, 운반업을 비롯한 전통 서비스업에서 일거리를 찾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불량주거지는 고급 아파트단지로 개발됐다.

단체를 결여한 농촌사회의 특질은 도시에서 그대로 재현됐다. 농촌에서는 읍·면을, 도시에서는 동을 경계로 한 전국의 연간 인구 이동률은 1970년대에 17%, 1980년대 22%, 1990년대엔 20%에 달했다. 같은 기간 대다수 한국인은 4~5년마다 더 좋은 직장과 주거를 찾아 철새처럼 유동했다. 인간을 한곳에 오래 머물게 할 지연과 직능의 단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도시는 낯선 사람들이 군집한 대중사회였다. 인간을 서로 신뢰하고 협동하게 하는 새로운 문명 원리는 미성숙 상태였다. 도시의 대중사회에서 한국인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전통 소농사회의 생활윤리를 익숙하게 재현했다.

한국 사회의 성격

축첩공무원 파면 기사(1961년 6월 4일자 동아일보)
축첩공무원 파면 기사(1961년 6월 4일자 동아일보)
1965년 최재석은 지금도 읽을 가치가 충분한 《한국인의 사회적 성격》을 출간했다. 그는 한국인의 사회적 행동을 설명하는 기본 원리를 가족주의에서 찾았다. 사회는 가족의 확장 형태였다. 가족생활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예민하게 상호 간 서열을 의식하면서 높은 지위의 감투를 추구했다. 가족의 경계가 명확하듯이 사람들은 그의 사회생활에서 친밀한 집단과 소원한 집단을 잘 구분했다. 친밀한 집단을 대표하는 것은 동족, 동향, 동창의 연고였다. 가족주의 사회에서 자립적 개인이란 범주는 결여됐다. 인간들은 개체로서 독립하기 이전에 그를 보호하고 이끌어줄 집단을 지향했다. 이후 한국인을 괴롭히는 지역감정은 정치가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지역감정은 집단을 지향하는 한국인의 행동원리에 배태해 있었다.

사회의 가족주의적 편성은 곳곳에서 공과 사의 혼란을 일으켰다. 사회적 신뢰는 점점 낮아지는 추세였다. 그에 따라 각종 갈등과 분쟁이 폭발했다. 1998년의 《사법연감》에 의하면 1987~1997년 인구가 11% 증가한 데 비해 소송 건수는 106% 늘었다. 1997년 한 해 동안 3.2명당 1명이 소송 관계로 법원을 찾았다. 신뢰와 협동의 단체를 결여한 한국 사회의 역사적 특질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대조적으로 인근 일본은 전통적으로 직능단체로 짜인 사회다. 2003년 일본의 연간 인구 이동률은 한국의 5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같은 해 일본의 인구당 민사소송 건수는 한국의 25%에 불과했다.

새마을운동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을 제창했다. 전국 3만4000개 농촌 마을은 자립마을, 자조마을, 기초마을의 세 등급으로 구분됐다. 자립마을은 지도자와 공동사업을 갖춘 곳으로, 7%에 불과했다. 기초마을은 두 요건을 결여한 후진적 마을인데, 53%나 됐다. 기초마을에서 사람들은 서로 무심하고 반목했다. 한 해의 절반은 일거리가 없는 휴일이었다. 남자들은 술과 도박으로 소일했다. 새마을운동은 이런 마을을 지원 대상에서 제외했다. 마을의 등급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충족해야 할 기준이 제시됐다. 이처럼 마을마다 등급이 부여되고 승격 기준이 제시되자 새마을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났다. 새마을운동은 한국인들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정치적 위신을 중심으로 해서는 얼마나 열정적으로 단결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새마을운동이 추구한 가장 의미있는 변혁은 마을을 공유재산과 공동사업의 주체로, 곧 법인으로 재편성하는 것이었다. 새마을운동에 의해 전국 모든 마을은 마을규약에 기초한 주민총회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총회는 지도자를 선발했으며 공동사업을 계획하고 추진했다. 마을이라는 사업체를 성공시키기 위해 주민들은 근면, 자조, 협동이라는 새마을정신으로 단결했다. 그런 일은 있어본 적이 없는 경이로움이었다. 새마을운동이 지금도 농촌 주민의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고도성장에도 '가족주의 틀' 못 벗어…'하면된다' 강조한 새마을운동
박 대통령에게 새마을운동은 환경 개선이나 소득 증대를 위한 농촌운동 이상의 것이었다. “퇴폐한 국민 도의를 진작한다.” 그가 일찍이 내건 혁명공약의 한 장이다. 새마을운동은 그것을 위한 일대 인간개조 운동이었다. 그가 지휘한 고도성장 체제가 국가 경제의 공학적 건설을 추구했다면, 새마을운동은 그에 상응하는 사회공학이었다. 그 실험은 그의 시대가 막을 내림에 따라 중단되고 말았다. 어느 나라든 성공한 근대화는 강인한 국민교육의 계몽기를 거쳤다. 그런 뒤에야 대중이 주체가 된 민주주의의 시대가 열렸다. 이 나라에서 국민적 계몽기는 너무 짧았는지 모른다. 이후 지금까지 전국의 마을은 농촌이건 도시건 슬슬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