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턱없이 적게 책정해 '소진'
돈 못 받은 4000명 항의 빗발
서울의 한 지역고용복지센터를 찾은 방문객들이 실업급여, 일자리지원금 등을 신청하고 있다.  /한경DB

서울의 한 지역고용복지센터를 찾은 방문객들이 실업급여, 일자리지원금 등을 신청하고 있다. /한경DB

임금피크제 적용 근로자 4000여 명이 정부 지원금을 제때 받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정부가 수요예측에 실패하면서 300억원가량의 재원이 부족해진 탓이다.

21일 기획재정부와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고용보험기금에서 책정해둔 임금피크제 정부 지원금 336억원이 모두 소진돼 ‘지급 불능’에 빠졌다. 정부가 지급해야 할 돈은 600억~700억원 규모다. 정부는 올해 임금피크제 지원금을 103억원으로 책정했다. 돈이 모자라자 기금에서 끌어다 쓸 수 있는 돈까지 합쳐 336억원을 마련했으나 여전히 300억원가량이 부족한 상태다.

각 지역고용센터에는 약속된 날짜에 돈이 나오지 않아 금융회사 대출금 상환이 무산되거나 병원비를 결제하지 못했다는 근로자들의 항의가 잇따르고 있다. 정부는 지난 19일 이와 관련한 긴급회의를 열었다.

정부는 만 55세부터 임금을 10% 이상 감액하는 임금피크제를 적용받는 근로자에게 2년간 1인당 연 최대 1080만원을 지원한다.
[단독] 임금피크제 지원금 300억 '지급불능'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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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피크제 정부 지원금은 근로자가 직접 고용노동부 산하 고용센터에 신청해 받는 구조다. 작년까지는 보통 신청 후 2주일 이내에 돈이 나왔다. 하지만 올해는 한두 달이 넘게 지원금이 나오지 않고 있다. 근로자 1인당 연간 최대 1080만원을 받기 때문에 적지 않은 돈이다. 중견기업 근로자 A씨는 “지원금을 받아 금리가 높은 저축은행 대출을 상환하고 이자가 싼 은행 대출로 갈아타려고 했는데 무산됐다”며 “고용센터에서는 ‘정부 예산이 바닥났다’는 말만 되풀이해 막막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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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끌어모아도 300억원 ‘펑크’

A씨처럼 임금피크제 정부 지원금을 받지 못한 근로자는 21일 기준으로 40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각 지역 고용센터에는 “정부가 약속한 돈을 제때 지급하지 못하는 게 말이 되냐”는 항의가 쏟아지고 있다.

임금피크제란 근로자가 일정 연령에 도달한 시점부터 임금을 삭감하는 대신 근로자 고용을 보장하는 제도다. 정부는 삭감된 임금의 50%를 최대 2년간 지원한다. 정부가 임금피크제 지원금을 주는 제도는 2006년부터 있었지만 액수는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정년이 만 55세에서 60세로 연장된 2016년부터 신청자가 급증했다. 지원 규모는 2017년 528억5000만원, 작년 884억4300만원으로 계속 늘었다.

정부가 올해 임금피크제 지원금으로 책정한 예산은 작년의 8분의 1도 안되는 103억원이었다. 하지만 신청을 받아보니 600억~700억원의 지원금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원금은 고용보험기금에서 나가는데 이 기금에서 ‘장년고용안정지원금’ 명목으로 잡힌 게 336억원이다. 장년고용안정지원금은 임금피크제 지원금 외에 퇴직자재고용 지원금, 다수고용 지원금 등에도 써야 하지만 정부는 급한 대로 이 돈 모두를 임금피크제 지원에 썼다. 그런데도 정부가 지급해야 할 돈의 절반 가까이인 300억원가량이 ‘펑크’가 난 것이다.

떨어지는 재정당국 예측력

정부가 올해 임금피크제 지원금 규모를 과소 추계한 이유는 이 제도가 중단되기 때문이다. 정부는 올해 임금피크제에 새롭게 들어가는 근로자부터는 지원금을 주지 않기로 했다. 올해 지원금을 받는 근로자는 작년과 재작년 임금피크제 대상자들이다.

고용부 관계자는 “연초에 지원금 신청자가 대거 몰리며 예산이 모자라는 일이 벌어졌다”고 설명했다. 올해 지원금(작년이나 재작년분)을 받는 사람은 아무 때나 신청해도 되지만 ‘정부 지원금이 끊긴다’는 뉴스가 나오자 불안감에 “연초에 돈을 달라”고 몰린 것이다. 고용부 관계자는 “1년에 한두 차례 기금운용계획을 변경해 지원금이 모자랄 것 같으면 증액해왔다”며 “올해는 심사위원회를 열기도 전에 예산이 소진됐다”고 말했다.

정부는 미지급 사태가 발생하자 지난 19일 뒤늦게 심사위원회를 열어 관련 예산을 652억원 증액하기로 했다. 정부 관계자는 “이르면 23일께부터 순차적으로 돈이 지급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당초 103억원의 예산만 책정해 놓은 것을 두고 “재정당국의 예측력이 너무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고용부는 작년 말까지 이 제도의 연장을 요구했지만 기획재정부가 반대했다. 기재부는 이 제도가 없어지는 만큼 많은 예산을 책정할 필요도 없다는 취지로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아직도 임금피크제를 처음 도입하려는 회사가 많다”며 “정부가 합당한 근거도 설명하지 않고 지원금을 끊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공공부문 노조를 중심으로 임금피크제 폐지를 요구하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노동계는 정년을 60세로 늘리되 임금피크제는 시행해선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기재부는 임금피크제 개편을 위한 연구용역을 맡긴 상태다.

이태훈/서민준 기자 bej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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