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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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전에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이 허허벌판에서 한국 조선업을 개척하던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모든 인력과 자본, 기술을 합쳐 한국 조선업을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

권오갑 현대중공업지주 부회장이 지난달 8일 산업은행과 대우조선해양 인수 본계약을 맺으면서 밝힌 소회다. 현대중공업그룹의 경영을 총괄하고 있는 권 부회장은 일찍부터 “한국 조선업이 세계 1위 자리를 지키려면 ‘빅2’ 체제가 바람직하다”고 말해왔다. 저가 수주 등 ‘제살깎기’ 경쟁이 사라져야 조선업이 빨리 살아날 것이란 이유에서다. 2014년부터 권 부회장의 주도로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통해 체질을 개선한 현대중공업이 이번에 대우조선해양 인수에 나선 배경이기도 하다.

지난 5년은 현대중공업과 한국 조선업에 격동의 세월이었다. 해운업 불황에 따른 ‘수주절벽’과 수조원대 적자 여파로 국내 조선업은 생존을 위한 도전에 직면했다. 권 부회장은 1972년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오히려 재도약의 기회로 삼았다. 선제적인 구조조정과 사업 분할, 지배구조 개편 등 ‘변화’와 ‘혁신’을 속도감 있게 추진하며 현대중공업그룹의 내실을 탄탄히 다졌다. 올해는 대우조선까지 품에 안으며 ‘조선강국 한국’의 위상을 지켜야 하는 막중한 책임까지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

韓 조선 재도약 위한 결단

세계 1위 조선사(수주잔량 기준)인 현대중공업이 2위인 대우조선 인수를 완료하면 ‘매머드급 조선사’가 탄생한다. 글로벌 조선시장 점유율만 21%에 달한다. 2015년 삼성과 한화그룹 간 빅딜을 제외하고는 외환위기 이후 20년 만의 최대 산업 재편이다.

권 부회장은 대우조선 인수는 반도체와 함께 세계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 조선을 지키기 위한 결단이었다고 했다. 그는 “조선3사(현대중공업·대우조선해양·삼성중공업)는 그동안 치열하게 출혈경쟁을 해왔다”며 “이대로라면 한국 조선업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판단 때문에 현대중공업이 통합의 선봉에 서기로 했다”고 강조했다.

현대중공업은 다음달 31일 임시주주총회를 열고 회사를 중간지주회사인 한국조선해양(가칭)과 사업회사인 현대중공업으로 분할한다. 대우조선을 현대중공업그룹에 편입하기 위해 중간지주사를 설립하는 것이다. 한국조선해양은 현대중공업·대우조선·현대삼호중공업·현대미포조선 등 4개 조선소를 각각 거느리게 된다. 권 부회장은 “그룹 산하 4개 조선사는 영업과 설계, 생산에 최적화하고 새롭게 출범하는 한국조선해양은 컨트롤타워 겸 연구개발(R&D) 전문회사로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밝혔다. 한국 조선업이 세계 1위 자리를 지키기 위해선 ‘기술개발’이 필수라는 그의 생각이 반영된 결정이다.

권 부회장은 대우조선 임직원의 고용 안정과 협력업체의 일감을 보장하는 상생발전 방안도 내놨다. 현대중공업은 지난 15일 조선기자재 자회사인 현대힘스와 현대중공업터보기계를 매각했다. 대우조선 조선소(거제)가 있는 경남지역 경제계가 현대중공업 자회사로 대우조선의 일감을 몰아줄지 모른다는 우려를 해소하기 위한 조치였다. 정부와 학계, 산업계가 참여하는 ‘한국조선산업 발전협의체’를 구성해 조선산업 생태계를 복원하겠다는 방안도 제시했다. 현대중공업 인수에 반대하는 대우조선 노동조합에 대해선 “대우조선 임직원들도 현대중공업과 동등한 권리와 대우를 받을 것”이라며 “진솔한 대화로 풀어나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2010년 현대오일뱅크 초대 사장으로 취임해 성과에 대한 보상과 소통을 통한 리더십으로 직원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번 대우조선 인수 후 조직 안정에도 자신감을 보이는 이유다.

위기의 현대重 ‘구원투수로’

“강도 높은 개혁을 통해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권 부회장이 2014년 9월 위기에 빠진 현대중공업의 경영 정상화를 이끌 ‘구원투수’로 등판하면서 밝힌 첫마디다. 그가 현대중공업 사장으로 취임했을 때 현대중공업은 3조원에 달하는 적자를 내고 생존을 위협받는 처지였다. 권 부회장은 경영위기 극복을 위해 전 임원의 사직서를 받는 것을 시작으로 강도 높은 개혁에 들어갔다. 새로운 조직에 필요한 임원들은 재신임을 통해 중용하고 능력 있는 젊은 부장급을 리더로 과감하게 발탁했다.

현대중공업과 현대삼호중공업, 현대미포조선 등 그룹 내 조선 계열사 영업조직을 통합한 ‘그룹선박영업본부’를 출범시켜 영업력도 극대화했다. 비핵심 자산을 잇달아 매각하며 재무구조도 크게 개선시켰다. 권 부회장의 이 같은 고강도 개혁 덕분에 현대중공업은 수주절벽과 유가 하락, 원자재 가격 상승 등 ‘삼중고(三重苦)’ 속에서도 2년 만인 2016년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지주사 체제 전환 이끈 ‘조타수’

권 부회장은 경영정상화 원칙들을 지키면서도 현대중공업그룹의 미래를 위한 도약의 기틀을 다졌다. 그는 2017년 4월 기관투자가들을 초청한 가운데 ‘기술과 품질 중심의 경영전략’을 발표하며 사업경쟁력 강화를 위한 4개 독립법인으로의 새 출발을 선포했다. 한 울타리 안에 있던 현대중공업(조선·해양플랜트)과 현대건설기계(굴착기·지게차), 현대일렉트릭(변압기), 현대로보틱스(산업용 로봇)를 독립법인으로 출범시켜 각 사업에 맞는 신속한 의사결정과 적절한 투자가 이뤄지도록 하기 위한 조치다. ‘따뜻한 빅텐트’인 현대중공업을 떠나면서 “이제 우리 힘으로 살아야 한다”는 독립법인 임직원의 절박함은 기업 체질을 개선시켰다. 그 결과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4개사 모두 분할 첫해인 2017년 나란히 흑자 달성에 성공했다.

권 부회장은 또 그룹 지배구조를 순환출자구조에서 지주회사체제로 전환하며 경영의 투명성도 한층 높였다. 현대중공업은 지주사체제로의 전환을 마무리한 지난해 8월엔 ‘주주 친화 경영’ 계획을 발표했다. 배당성향(당기순이익 중 현금배당금이 차지하는 비율)을 지주사는 70% 이상, 자회사는 30% 이상으로 유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작년 국내 기업의 평균 배당성향(20.7%)을 웃도는 수준이다. 권 부회장은 “‘기술’을 최우선으로 삼아 첨단기술그룹으로 재도약할 것”이라며 “고객과 주주, 사회에 기여하는 회사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익 날 때까지 월급 전액 반납"…흑자 돌아섰지만 3년간 無보수 경영

권오갑 현대중공업지주 부회장 "한국 造船을 지키자" 총대 메고 대우조선 인수 결단
가을비가 내리던 2014년 9월 23일 울산 방어동 현대중공업 해양사업본부 출입문 앞. 권오갑 현대중공업지주 부회장(사진)은 우산도 쓰지 않은 채 출근하는 직원들에게 “위기에 빠진 회사가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힘을 모아달라”고 호소했다. 3조2490억원에 달하는 막대한 영업손실로 회사 존립이 위태로울 때였다. 현대중공업 신임 사장에 취임한 권 부회장은 “회사가 이익을 낼 때까지 급여 전액을 반납하겠다”며 무보수 경영을 선언했다. 현대중공업은 2016년 흑자로 돌아섰지만 그는 현대중공업 부회장으로 재직한 2017년 하반기까지 3년간 임금을 받지 않았다.

권 부회장은 직원들과의 소통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그가 현장을 자주 찾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대오일뱅크 사장 시절엔 매주 화요일 충남 대산 공장을 찾아 직원들과 아침식사를 같이하며 현장의 목소리를 들었다. 매주 금요일엔 ‘경영진과의 대화’ 시간도 마련했다. 사장 업무용 차량(에쿠스)을 직원 결혼식 및 장례식 등 경조사에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임원식당을 없애는 등 권위주의적 기업문화를 깨는 데도 각별히 신경 썼다. 소통을 바탕으로 한 최고경영자(CEO)와 직원들의 끈끈함은 국내 4대 정유사 중 규모가 가장 작은 현대오일뱅크를 영업이익률 1위 회사로 탈바꿈시켰다.

권 부회장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도 관심이 많다. 그는 현대오일뱅크 사장으로 있을 때 대기업 최초로 임직원 월급의 1%를 재원으로 ‘현대오일뱅크1%나눔재단’을 설립했다. 그룹에서는 사회공헌협의회를 신설해 전 임직원이 매년 20시간 이상의 봉사활동을 펼치도록 했다. 일자리 창출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조선업황 침체 속에서도 지난 5년간 신입·경력사원 3700여 명을 채용했다. 권 부회장의 활동은 기업에 국한돼 있지 않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2009~2016년 한국실업축구연맹 회장을 지낸 데 이어 2013년부터는 한국프로축구연맹 총재를 맡고 있다.

■권오갑 부회장 프로필

△1951년 경기 성남 출생
△1975년 한국외국어대 졸업
△1978년 해병대 중위 전역, 현대중공업 입사
△1990~1997년 학교법인 울산공업학원, 현대학원 사무국장
△2007년 현대중공업 서울사무소장(부사장)
△2009~2016년 한국실업축구연맹 회장
△2010~2014년 현대오일뱅크 사장
△2014~2016년 현대중공업 사장, 그룹기획실장
△2016~2017년 현대중공업 부회장
△2013년~ 한국프로축구연맹 총재
△2018년~ 현대중공업지주 부회장


김보형 기자 kph21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