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 일선서 전격 은퇴

어선 1척·선원 3명으로 창업
세계 최대 수산회사 꿈 이뤄
"이젠 무거운 짐 내려놓고 응원"
5대양 거친 파도 헤치며 水産제국 일구다…'50년 선장' 김재철의 아름다운 퇴장

1934년 전남 강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김재철. 공부에 재능이 있던 그였다. 하지만 고3 때 선생님의 한마디에 인생 항로를 바꿨다. “나 같으면 바다로 가겠다.”

그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고작 뱃놈이 되겠다는 것이냐”는 아버지의 호통을 뒤로하고 부산으로 갔다. 수산대(현 부경대)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수많은 청춘이 배를 타다 영원히 바다로 가버렸다는 얘기도 들었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최초의 원양어선 지남호가 출항한다는 얘기를 듣고 배에 몸을 실었다. “죽어도 좋다”는 각서를 쓴 채. 대학을 졸업한 청년 김재철은 선장이 됐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항해를 시작했다. 일본 배를 빌려 세계의 바다를 누볐다. 참치를 잡으며 생각했다. ‘언젠가는 저들을 넘어서리라.’

그는 다른 뱃사람들과 달랐다. 배에서도 책을 끼고 살았다. 고기 잡는 법을 연구하고 메모했다. 참치를 잘 잡은 그는 ‘캡틴 JC KIM’으로 불렸다. 1969년 4월 원양어선 한 척, 선원 세 명과 함께 회사를 차렸다. 동원산업이었다.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은 이후 수십 년간 참치, 바다와 함께했다. 그는 말했다. “숨 가쁘게 달리다 돌아보니 꿈꾸던 대로 ‘세계 최대 수산회사’가 돼 있었다.” 그의 사업은 수산업에 머물지 않았다. 1980년대 초 그는 미국에서 연수를 하다 금융산업에서 또 다른 미래를 발견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1982년 한신증권을 인수, 증권업도 시작했다. 한국투자금융그룹의 출발이었다.

16일 동원산업 창립 50주년 기념식이 경기 이천 연수원에서 열렸다. 기념사를 하던 그는 말했다. “이제 무거운 짐을 내려놓겠습니다.” 장내는 조용해졌다. 그룹 회장의 은퇴 선언이었다. 하지만 일반 선장의 은퇴식과 다르지 않았다. 오래전 함께하던 뱃사람들 그리고 직원들과 사진을 찍는 것이 끝이었다. 참치왕, 재계의 신사, 21세기 장보고로 불린 김재철 선장은 50년 짊어진 파도 같았던 짐을 내려놓고 자연인으로 돌아갔다.

김용준 생활경제부장 juny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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