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가까이 화재원인 '캄캄'
직격탄 맞은 배터리업계
중소 사업자도 고사 위기
결국 1분기 신규발주 '0'…정부만 믿다가 무너지는 ESS 생태계

정부가 신재생에너지와 함께 ‘신산업’으로 육성하려던 에너지저장장치(ESS)산업이 무너지고 있다. 지난해 5월부터 전국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난 ESS 화재 사고의 원인 규명이 1년 가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탓이다.

ESS 업체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다. 정부의 각종 인센티브와 주문 급증에 사상 최대 실적을 내다가 날벼락을 맞았기 때문이다. 올 1분기(1~3월) 신규 ESS 발주가 ‘올스톱’되면서 실적은 ‘제로(0)’다. 이미 계약한 사업들도 취소되거나 무기한 중단됐다. 은행들이 관련 대출을 해 주지 않아 돈줄까지 막혔다. 올해 시장이 급성장할 것으로 보고 사업을 키운 중소 업체들은 고사 직전에 내몰렸다. ESS는 전력 등 에너지를 저장해 뒀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장치다.

결국 1분기 신규발주 '0'…정부만 믿다가 무너지는 ESS 생태계

배터리업계 줄줄이 적자

14일 전자업계에 따르면 올 1분기 국내에서 진행된 신규 ESS 설치 사업 발주는 ‘0건’이다. 지난해 5월부터 전국에서 잇따라 발생한 20여 건의 ESS 화재 사고 원인을 규명하지 못해서다.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민관 합동 사고 원인 조사위원회’는 다음달 말 사고 원인을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이마저도 연기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 원인이 밝혀지지 않자 보험회사들은 신규 사업을 추진하는 사업주의 보험 가입을 거부하고 있다. 은행들은 보험 가입이 안 된 사업에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 업체들이 지난해부터 계획한 사업이 줄줄이 무산되는 이유다.

관련 생태계도 무너지고 있다. ESS 관련 사업에는 △시공사(KT, LG CNS) △배터리 제조업체(삼성SDI, LG화학) △전력변환장치(PCS) 생산업체(효성중공업, LS산전) 등뿐만 아니라 수배전반, 전기공사를 담당하는 영세 업체들이 모여 거대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관련 업체만 200여 곳에 달한다.

배터리 업체가 먼저 직격탄을 맞았다. 증권업계에 따르면 LG화학과 삼성SDI는 올 1분기 중대형 배터리 사업에서 적자를 낸 것으로 추정됐다. 삼성SDI는 600억원 이상 적자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4분기 중대형 배터리 부문에서 흑자를 낸 LG화학도 다시 적자로 돌아섰다. LG화학은 ESS 화재 사고에 대비해 사고처리비용으로 1000억원 규모의 충당금을 설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ESS산업을 ‘알짜 신산업’으로 보고 육성해온 배터리업계는 그동안 전기차 배터리 부문에서 발생한 적자를 ESS용 배터리에서 메워 왔다.

과감히 투자했다가 ‘날벼락’

정부의 육성책만 믿고 중소 업체들이 과감하게 투자를 늘린 것도 ‘독’이 됐다. PCS 개발과 시공 등을 하는 N사의 대표는 “지난해 PCS 제조 공장을 설립하고 제품을 개발하는 데 60억원을 투자했다”며 “올해 시장이 커질 것이라고 판단해 20여 명을 신규 고용했는데 일감이 없어 기술 교육만 반복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지난해 ESS 부문에서 200억원의 매출을 올린 이 회사는 올해 관련 매출이 전무하다.

또 다른 PCS 제조사 대표는 “지난해 말 인력을 20%나 늘리고 부품 발주도 다 해놨는데 모두 재고로 쌓여 있다”며 “화재 사고 원인 규명이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구조조정도 하지 못한 채 ‘희망고문’만 당하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해외 수주도 문제다. 미국과 호주 등 해외에서 ESS 관련 산업이 급성장하고 있지만 한국 내 화재 사고 원인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으면서 불안해하는 고객사들이 많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업계 관계자는 “해외에서 수주하려고 해도 ‘화재 원인이 규명됐는지 브리핑해 달라’는 요청부터 온다”고 말했다.

산업부 관계자는 “21개 현장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직접적으로 관련된 업체도 30곳이 넘어 정교한 검증이 필요한 상황”이라며 “현재 원인을 추정한 뒤 시험 실증을 진행하는 단계로, 재발 방지 대책을 함께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SS(에너지저장장치)

energy storage system. 전력이 남아돌 때 저장한 뒤 부족할 때 쓰거나 필요한 곳으로 보내주는 장치.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나 저렴한 심야 전력 등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개발됐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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