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3월 6일 서울 김포공항에서 열린 대한항공공사 인수식.  /대한항공 제공
1969년 3월 6일 서울 김포공항에서 열린 대한항공공사 인수식. /대한항공 제공
대한항공의 모태인 한진그룹 창업주인 고(故) 조중훈 회장은 수송으로 국가에 보답한다는 ‘수송보국(輸送報國)’을 경영철학으로 삼았다. 한평생 수송 외길을 걸으면서 한국 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운수업을 택한 것은 교통과 수송이 인체의 혈관처럼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기간산업이라고 판단해서다. 조 회장의 장남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70)과 손자인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44)도 창업주의 뜻에 따라 수송보국의 외길을 걷고 있다.

창립(1969년 3월 1일) 50주년을 맞은 대한항공의 출발은 초라했다. 국영 대한항공공사에서 인수한 항공기는 딱 8대. 그것도 제트기(DC-9)는 1대뿐이고, 나머지는 2차 세계대전 때 쓰던 군용기를 개조한 구형 프로펠러기(7대)였다. 대한항공은 이후 반세기 동안 한국을 대표하는 국적 항공사로 항공산업을 이끌었다. 화물 기준 세계 5위, 여객 기준 세계 15위의 글로벌 항공사로 비상했다. 현재 항공기 166대를 보유하고 세계 44개국, 124개 도시를 누빈다. 재계 관계자는 “대한항공의 비약적 성장에는 역경을 헤치며 끊임없는 도전을 거듭해온 창업 일가의 3대에 걸친 리더십을 빼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2019년 3월 4일 서울 공항동 대한항공 본사 격납고에서 열린 창립 50주년 기념식.
2019년 3월 4일 서울 공항동 대한항공 본사 격납고에서 열린 창립 50주년 기념식.
부실 공사 인수해 항공업 첫발

“우리나라 국적기를 타고 해외여행 한 번 해보는 게 내 소망이오.” 1969년 조 창업주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탁을 받고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했다. 부채만 27억원에 달하는 부실 덩어리였다. 인수를 반대한 중역들에겐 “대한항공공사 인수는 국익과 공익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소명”이라며 밀어붙였다. 대한항공공사 인수 직후 베트남 사이공(현 호찌민)에 취항했다. 베트남전 파병 군인과 기술자들을 국적기에 태워야 한다는 소신 때문이었다.

1974년 9월 10일 서울 김포공항에서 대한항공 B747 화물기가 세계 최초 태평양 횡단 노선에 취항한 것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1974년 9월 10일 서울 김포공항에서 대한항공 B747 화물기가 세계 최초 태평양 횡단 노선에 취항한 것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대한항공은 한국 경제 발전과 민간 외교에도 힘을 보탰다. 1970년대에는 태평양과 유럽, 중동 노선을 잇따라 열었다. 1972년 4월 19일 하와이 공항에 착륙하는 대한항공 B707 여객기를 바라보던 교민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조 창업주는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의 숨은 공신으로도 꼽힌다. 1981년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한국을 지지한 제3세계 표를 모으는 데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 1988년엔 서울올림픽 공식 항공사로 한국을 세계에 알렸다.

조 창업주는 자주국방에도 기여했다. 1979년 박 전 대통령에게 “3년 안에 전투기를 출고하겠다”고 약속한 뒤 인력 양성과 생산설비 투자 등 각고의 노력 끝에 1982년 국산 첫 전투기인 ‘제공호’를 선보였다. 제공호는 대한항공이 항공기 부품 개발·정비와 무인기·우주발사체 개발 등 항공우주사업을 이끌어나가는 기반이 됐다.

1979년 3월 29일 뉴욕 JFK공항에서 열린 대한항공 서울~뉴욕 노선 취항식. 고(故)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가운데)가 취항식에서 테이프를 자르고 있다.
1979년 3월 29일 뉴욕 JFK공항에서 열린 대한항공 서울~뉴욕 노선 취항식. 고(故)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가운데)가 취항식에서 테이프를 자르고 있다.
차세대 항공기로 성장 발판 마련

1990년대 들어 세계 항공운송산업이 성장하면서 전 세계 항공사들의 무한경쟁이 시작됐다. 1992년 대한항공 사장에 이어 1999년 대한항공 회장에 오른 조양호 회장은 과감한 투자로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보다 넓은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표적인 게 신시장 개척이다. 대한항공은 1990년 3월 모스크바 정기 노선을 개설한 이래 시드니와 상파울루, 카이로, 베이징, 칭다오, 톈진, 선양 노선에 잇따라 취항하며 오대양 육대주를 아우르는 노선망을 갖췄다. 조 회장은 항공기 매각 후 재임차 등 선진적인 경영을 통해 1997년 외환위기도 슬기롭게 돌파했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외환위기 당시 대한항공 운영 항공기 112대 중 임차기는 14대뿐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자체 소유 항공기였다”며 “항공기 매각 후 재임차 등 다양한 전략을 통해 유동성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조 회장은 1997년 보잉747 괌 추락 사고 등을 계기로 대한항공의 안전 기준을 미국 연방항공청(FAA) 수준으로 강화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다국적 전문가들의 컨설팅과 해외 안전 전문가 영입 등을 통해 ‘절대안전운항체제’ 구축에 주력했다. 덕분에 대한항공은 2000년 이후 단 한 건의 인명 사고도 발생하지 않은 안전한 항공사로 거듭났다.

2017년 6월 23일 대한항공과 미국 델타항공 간 조인트벤처(JV) 협약 체결식.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왼쪽 세 번째)과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네 번째).
2017년 6월 23일 대한항공과 미국 델타항공 간 조인트벤처(JV) 협약 체결식.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왼쪽 세 번째)과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네 번째).
스카이팀으로 글로벌 항공사로

조 회장은 2000년대 대한항공을 ‘글로벌 선도 항공사’ 반열에 올려놓았다. 델타·에어프랑스 등과 국제 항공동맹체인 ‘스카이팀’ 설립을 주도하면서부터다. 19개 회원사가 175개국 1150개 취항지를 연결하는 스카이팀은 매일 전 세계에서 1만4500편을 운항하며 연간 6억3000만 명을 수송하는 대표적 항공동맹체로 성장했다.

그는 선제적인 항공기 도입을 통해 미래 성장동력도 확보했다. 2001년 9·11 테러, 2003년 이라크 전쟁과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여파로 전 세계 항공사들이 긴축경영을 할 때 조 회장은 오히려 항공기 도입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대한항공은 2003년 에어버스 A380 초대형 차세대 항공기를 시작으로 2005년에는 보잉 B787 차세대 항공기 도입을 연이어 결정했다. 2006년 이후 세계 항공 시장은 회복세로 돌아섰고 항공사들은 앞다퉈 차세대 항공기를 주문하기 시작했다.

항공사 간 저가 경쟁을 내다보고 2008년 저비용항공사(LCC)인 ‘진에어’ 설립을 결정한 것도 조 회장이다. 그 결과 대한항공은 프리미엄 수요 위주의 비즈니스 노선 전략을, 진에어는 저렴한 운임의 관광 노선 위주의 전략을 펼치면서 비즈니스와 관광 수요를 동시에 잡을 수 있었다.

조 회장은 세계 속에 한국을 알리는 민간외교사절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2008년 2월)과 영국 대영박물관(2009년 12월),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2015년 9월)에 한국어 안내 서비스를 후원하며 한국어의 위상을 높였다. 작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와 성공 개최에도 앞장섰다. 오는 6월에는 ‘항공업계의 유엔 총회’로 불리는 국제항공운송협회(IATA) 연차 총회를 주관한다. IATA는 세계 120개국 287개 민간 항공사가 가입한 국제협력기구다. 이번 총회에는 항공 관련 인사 1000여 명이 참석한다.

2023년 매출 16조원 목표

대한항공은 2010년대 들어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2018년 5월엔 미국 델타항공과의 태평양노선 조인트벤처(JV)의 성공적인 출범을 이끌어냈다. 미주와 아시아를 연결하는 네트워크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게 됐다. 전사 시스템을 아마존웹서비스(AWS) 클라우드로 전면 전환하며 4차 산업혁명 시대도 준비하고 있다. 2017년 대한항공 대표이사에 취임한 조원태 사장은 스스로를 ‘대표 사원’으로 부르며 화합을 바탕으로 한 ‘원 팀(one team)’을 추구하고 있다. 조 사장은 조종사노조와 조종사새노조, 일반노조 등 3개 노동조합과도 적극적으로 소통 중이다. 2017년 3월 조종사노조가 예고했던 파업을 철회한 것도 이 같은 노력 덕분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대한항공은 3대에 걸친 ‘수송보국’ 리더십을 기반으로 지난달 중장기 성장 전략인 ‘비전 2023’을 발표했다. 2023년까지 매출 16조2000억원, 영업이익 1조7000억원, 영업이익률 10.6%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다. 자산 27조원, 보유 항공기 190대 등 외형 성장뿐 아니라 부채 비율을 400% 미만으로 낮춰 내실 경영도 강화하기로 했다. 성장성과 수익성, 안정성 등 ‘세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겠다는 구상이다.

김보형 기자 kph21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