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본시장을 뒤흔든 사건 (16) 1997년 12월 금융개혁법안 통과

힘 있는 한은의 탄생…美 Fed 직원이 설립 '밑그림'
외환관리·통화·신용 정책 등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한 누려
1950년 6월 5일 처음 열린 금융통화위원회 회의 그림. 대한민국 2대 재무부 장관인 최순주 의장이 서류를 들고 가운데 서 있다. 그의 오른쪽이 구용서 초대 한국은행 총재다. /한국은행 제공

1950년 6월 5일 처음 열린 금융통화위원회 회의 그림. 대한민국 2대 재무부 장관인 최순주 의장이 서류를 들고 가운데 서 있다. 그의 오른쪽이 구용서 초대 한국은행 총재다. /한국은행 제공

“정치 압력에서 자유로운 통화정책기구를 둔다고요?”

해방 직후 화폐 발행 남발로 물가가 4년간 20배 폭등했던 1949년 가을. 조선은행 직원들은 한 미국인이 내놓은 ‘금융통화위원회’ 설치 구상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해 9월 이승만 정부의 요청으로 뉴욕연방준비은행에서 파견나온 35세의 젊은 금융이론가. ‘한국은행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서 블룸필드 박사였다.

1950년 제정한 한국은행법의 산파 역할을 한 아서 블룸필드 박사.  /한국은행 제공

1950년 제정한 한국은행법의 산파 역할을 한 아서 블룸필드 박사. /한국은행 제공

블룸필드 박사는 이후 조선은행 직원들과 5개월에 걸쳐 ‘중앙은행 개편에 관한 건의안’을 완성했다. 이듬해 6월 정부는 그의 보고서를 참고해 대한민국 최초의 자주적 중앙은행을 설립했다. 금통위를 최고 의사결정기구로 두는 특수법인 한국은행의 탄생이었다.

건국 초기 한은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한을 자랑했다. 영업자산과 함께 물려받은 조선은행의 외환관리 업무에 더해 국가의 통화·신용 정책을 총괄했다. 재무부에서 은행감독권도 가져왔다. 일부 국회의원이 “대통령은 껍데기고, 알맹이는 한국은행 총재”라고 비꼬았을 정도였다.

재무부 장관이 금통위 의장을 겸임했지만 강한 견제를 받아야 했다. 재무부 사람들은 정부청사를 ‘(한은의) 세종로 출장소’라 자조하며 절치부심했다. 이후 반세기에 걸친 금융권력 전쟁으로 번지는 불씨는 그렇게 타오르고 있었다.

‘금융통과(通過)위원회’ 시절

한은의 영화는 1961년 5·16 군사정변을 맞아 급속히 기울기 시작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강력한 정부 주도의 경제성장 전략을 추진했다. 금융권력도 자연스럽게 ‘낮은 금리와 원화가치’를 유지해 성장과 수출 증대를 뒷받침하려는 재무부로 이동했다. ‘높은 금리와 원화가치’로 물가 상승을 방어하려는 속성의 중앙은행 입지는 후퇴했다.

1962년 5월 한은법 개정은 한은 역사상 가장 치욕적이었다. 외환 업무가 다시 재무부로 돌아갔고 금통위는 ‘금융통화운영위원회’로 명칭을 바꿨다. 정책 수립보다 운영관리에 집중하라는 의미였다. 금통운위 결정을 뒤집을 수 있는 ‘재무부 장관의 재의 요구권’까지 신설해 한은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재무부가 끊임없이 환수를 시도했던 은행감독원은 계속 한은에 남았다. 대신 이후 차례로 설립된 증권·보험감독원과 신용관리기금은 모두 재무부 산하로 들어갔다.

재무부의 위상은 1974년 재무부 이재국장(금융정책국장) 출신 김용환 장관이 취임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김 장관은 취임 직후 한은 은행감독원에 대기업 대출을 총괄하는 여신관리국을 신설하고 재무부 출신을 국장으로 앉혔다. 대기업 자금줄까지 틀어쥔 ‘모피아’(재무부 출신 인사: 재무부(MOF)와 마피아의 합성어) 전성시대의 개막이었다.

이번에는 한은에서 ‘우리가 (재무부의) 남대문 출장소’로 전락했다는 탄식이 나왔다. 언론은 정부의 거수기 역할을 하는 금통운위를 ‘금융통과(通過)위원회’라 조롱했다.

억눌린 한은의 폭발

“국민이 한은의 중립성 강화에 힘을 실어주십시오!”

1959년 한국은행 본관 전경. 1912년 완공 당시 조선은행이 본점 건물로 썼다. 1950년 6월부터는 조선은행 자산을 승계한 한국은행 본점이 됐다. 2001년 한국은행 창립 50주년을 맞아 화폐박물관으로 개관했다. /국가기록원 제공

1959년 한국은행 본관 전경. 1912년 완공 당시 조선은행이 본점 건물로 썼다. 1950년 6월부터는 조선은행 자산을 승계한 한국은행 본점이 됐다. 2001년 한국은행 창립 50주년을 맞아 화폐박물관으로 개관했다. /국가기록원 제공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 열풍이 거세지자 한은은 반전을 모색했다. 그해 7월 부산지점 행원들이 ‘헌법으로 독립성을 보장해달라’는 성명을 발표하며 먼저 불을 댕겼다. 이후 독립 투쟁의 열기는 본점과 학계로 확산했다. 대선을 앞둔 정치권도 하나같이 독립성 보장을 공약으로 내걸며 시류에 올라탔다.

노태우 정부 출범 첫해인 1988년 11월. 정부와 여당(민정당), 야3당(평화민주·통일민주·신민주공화당)은 기존 공약에 따라 각각의 한은법 개정안을 연달아 발표했다. 모두 ‘한은 총재와 금통위(명칭 복원) 의장을 같은 인물로 한다’고 명시했지만 한은 기대에는 크게 못 미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특히 ‘재무부 차관을 당연직 금통위원으로 둔다’(여야)는 조항과 ‘은행감독을 분리한다’(여)는 조항에 한은은 큰 배신감을 느꼈다.

급기야 김건 한은 총재가 직접 나서 여야 개정안을 모두 ‘개악’이라 비판했다. 그리고 11월 14일 기자회견을 열고 독자적인 개정방안을 제시했다. 한은 총재가 금통위 의장을 맡고 재무부의 한은 업무 검사권을 폐지하자는 내용이었다. 재무부는 즉시 발끈했다. “정부와 최소한의 통화정책 연결고리마저 끊고 모든 권한을 가져가려 한다”고 공격했다. 이때부터 양측은 직원들을 총동원해 국회와 언론, 학계를 포섭하는 백병전에 들어갔다. 한은 직원들은 독립성 보장 100만 명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원칙도 소신도 없었던 힘겨루기는 1989년 11월에 이르러서야 휴전에 들어갔다. 금통운위가 먼저 ‘개정을 장기 과제로 넘기자’고 건의하자 국회도 동의했다.

재무부의 기습

김영삼 정부 3년차였던 1995년. 이번엔 경제 관료들이 기습 작전을 감행했다. 재무부와 경제기획원 통합으로 탄생한 재정경제원은 2월20일 오후 2시 전격적으로 한은법 개정안을 발표했다. 경제학자 1000명의 ‘한은 독립촉구 성명’으로 한은법이 다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지 나흘 만이었다.

탄탄한 이론과 철저한 교육으로 재무장한 재경원의 공세는 매서웠다. 법안은 8일 만에 국무회의를 통과하고 국회 상정까지 마쳤다. 이석채 당시 차관은 “재경원 800명이 한은 3000명을 이기려면 한 사람당 4배 이상 홍보해야 한다”며 전의를 불태웠다. 개정안의 내용은 7년 전 정부안과 거의 같았다. 금통운위 의장이 한은 총재를 겸임하고, 은행감독원은 한은에서 떼내 재경원 산하 통합금융감독기구로 옮긴다는 밑그림이었다.

허를 찔린 한은은 결사항전에 나섰다. 일부 간부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분신까지 불사하겠다’고 위협했다. 야당도 ‘김영삼 정부가 관치금융 역주행에 앞장서고 있다’며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여론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협조를 약속했던 청와대가 슬그머니 발을 뺐다. 결국 개정안은 그해 4월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심사소위 벽을 넘지 못했다. 이 차관은 분한 마음에 한동안 소위 회의실을 떠나지 못했다.

다시 외부의 힘으로

한은법 개정의 세 번째 시도는 1997년 경제위기와 함께 찾아왔다. 김영삼 정부는 1997년 1월 대통령 직속 금융개혁위원회를 설치하고 금융개혁을 밀어붙였다. 민간위원들로 구성한 금개위는 그해 6월 통합 금융감독위원회 신설을 뼈대로 하는 금융개혁법안 제정을 권고했다. 은행·증권·보험감독을 아우르는 금감위를 만들어 국무총리 산하에 두자는 게 핵심이었다. 그 전에 반드시 넘어야 할 장애물인 한은법 개정은 ‘한은 총재가 금통위 의장을 맡고, 은감원은 분리한다’는 내용으로 정리했다.

재경원과 한은 모두 받아들이기 힘든 권고였다. 하지만 한보그룹 등 잇단 기업부도 사태로 개혁을 늦출 수 없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결국 재경원 장관과 한은 총재가 극적으로 합의하면서 법안 제정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재경원은 ‘나중에 금융감독권을 되찾아오자’고 직원들을 다독이며 증권·보험감독원을 내주는 정부안을 작성했다.

문제는 한은 임직원들이었다. 결코 은감원은 내줄 수 없다며 총력 투쟁을 선언했다. 권고안에 합의한 이경식 총재를 배신자로 낙인찍고 퇴진운동도 벌였다. 나중에는 전 직원 총사퇴까지 결의했다. 한은의 맹렬한 기세에 야당마저 유보적 자세를 취하면서 법안 처리 가능성은 다시 희박해졌다.

극적인 반전의 계기는 ‘국가 부도’ 사태였다. 국제통화기금(IMF)은 11월 21일 구제금융을 공식 신청한 한국에 달러를 빌려주는 대가로 금융개혁법안 연내 처리를 압박했다. 뒷감당이 두려워진 의원들은 12월 29일 임시국회를 열고 13개 금융개혁법안을 속전속결로 처리했다. 1950년 미 중앙은행(Fed)의 도움으로 탄생한 한국의 중앙은행과 금융감독시스템. 그 권한을 둘러싼 전쟁이 반세기 만에 다시 외압으로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새로운 역사

1998년 4월 금융감독위원회 출범식.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왼쪽)와 이헌재 초대 위원장이 악수하고 있다.  /e영상역사관 제공

1998년 4월 금융감독위원회 출범식.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왼쪽)와 이헌재 초대 위원장이 악수하고 있다. /e영상역사관 제공

“그간의 고군분투에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

“어찌 이곳을 잊으랴…한국금융의 고향.”(한은을 떠나는 은행감독원 임직원들이 화단에 세운 비문 중)

경제부처와 한은의 전쟁은 결국 모두에게 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남긴 채 허탈하게 끝났다. 1998년 4월 김대중 정부는 금융감독위원회를 설립하고 이헌재 초대 위원장을 선임했다. 금감위 위탁을 받아 은행·증권·보험 감독업무를 집행하는 금융감독원은 이듬해 1월 탄생했다. 금감원장은 금감위원장이 겸직했다

금융감독 체계는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08년 2월 또 한 차례 큰 변화를 맞는다. 이명박 정부는 급격히 변화하는 금융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며 재정경제부의 금융정책 기능을 떼어 금감위에 붙인 금융위원회를 출범했다. 금융위원장도 금감원장을 겸직하지 못하도록 했다.

관료들의 새로운 둥지로 다시 몸집을 부풀린 금융위, 그리고 옛 한은처럼 정부와 중첩적인 감독집행 권한을 가진 특수법인 금감원. 그들 간 끝나지 않을 새로운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