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전희성 기자 lenny80@hankyung.com
일러스트=전희성 기자 lenny80@hankyung.com
아마존, 넷플릭스, 에어비앤비, 스타벅스 등 수천 개 기업이 사용하는 사용자경험(UX) 디자인을 위한 소프트웨어가 있다. 이 소프트웨어는 디자이너가 만든 초기 모델(프로토타입)을 마케팅·판매·고객서비스 담당자 등 다른 부서 직원이나 파트너사와 공유하고 디자인에 대한 의견을 받아 고칠 수 있다. “우리 회사 앱(응용프로그램) 로그인 버튼 위치를 바꾸자”라든가, “배경색을 좀 다르게 하는 게 좋겠다”는 등의 의견이 매일 쌓이고, 쉽게 반영된다.

세계적인 기업들이 쓰는 ‘인비전(InVision)’ 소프트웨어 이야기다. 회사의 설명에 따르면 인비전 소프트웨어를 디자인에 활용하는 사람 수는 약 500만 명에 이른다. 세계에서 제일 돈이 많은 사람인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최고경영자(CEO)도 인비전 앱을 수시로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용자가 많은 만큼 직원 수도 적지 않다. 800명에 이른다. 하지만 사무실조차 없다. 그리고 기업가치는 2조원이 넘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디자인 기반 혁신 돕는다”

이 회사가 하는 일은 간단하다. 현대 기업은 대부분 온라인에서 고객과의 접점을 찾는다. 스마트폰 앱이나 PC 홈페이지 등이다. 이 화면을 어떻게 구성하는가는 사용자가 그 기업이 기대하는 행동을 하도록 이끌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를 좌우한다. 비즈니스의 모든 소통이 첫 화면과 그다음 몇 단계에서 구현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기업이 그런 사용자경험 디자인에 익숙한 것은 아니다. 또 모든 기업의 모든 구성원이 그것을 이해하고 있지는 않다. 디자이너 한 명을 채용해서 맡긴다고 일이 되진 않는다. 기업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화하고 목표를 달성하도록 돕는 플랫폼, 이 부분이 인비전이 파고든 영역이다.

클라크 발버그 인비전 CEO는 2011년 인비전을 세웠다. 그 전엔 미국 뉴욕의 웹디자인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의 주요 고객사 중 하나는 교육과정을 설계하는 회사였는데, 소프트웨어를 출시하는 정보기술(IT) 회사가 아니다 보니 프로젝트 담당 직원은 사내에서 뭘 원하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그 고객사의 요구사항을 파악하기 위해 만든 프로그램이 인비전의 씨앗이 됐다.

발버그 CEO는 “휴대폰과 컴퓨터의 화면이 가장 중요한 공간이 되고 있다”며 “이 공간에서 비즈니스의 모든 대화가 이뤄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버, 에어비앤비 등 유니콘(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 기업이 탄생한 배경이 이 공간을 장악한 데 있다는 분석이다. 인비전은 지난해 12월 스파크캐피털, 골드만삭스 등으로부터 1억1500만달러 투자를 유치하면서 기업가치 19억달러(약 2조1300억원)를 인정받았다.

발버그 CEO는 “하나의 문서나 15분간 회의로는 조직 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알아내기 어렵다”며 “사람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프로토타입을 공유해 디자인 뼈대를 세울 때부터 다른 직원들이 피드백을 남길 수 있는 기능을 개발한 이유다. 의사소통이 동시에 이뤄지지 않을 때도 의견을 취합해 디자인에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발버그 CEO는 “모든 직원이 디자인 기반 혁신에 기여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했다.

모든 직원이 원격 근무해야 효과

인비전은 창업 초기부터 개발자 구인난에 부딪혔다. 당시 구글이 뉴욕 맨해튼 사무실을 확대하기 위해 개발자를 대거 채용할 계획을 내놨기 때문이다. 이때 생각해낸 묘수가 바로, 상대적으로 프로그래머 수요가 적은 캐나다 서스캐처원주, 미국 캔자스주 위치토, 애리조나주 피닉스 등지에서 기존 임금의 두 배를 주고 엔지니어를 채용하는 것이었다. 두 배를 지급하더라도 실리콘밸리와 뉴욕에서 지급해야 하는 임금보다는 훨씬 적었다.

지리적 한계가 사라지자 채용은 수월해졌다. 인비전 직원은 현재 800명 규모로 늘었다. 하지만 물리적 사무 공간은 여전히 없다. 직원 대부분이 UX 디자이너여서 노트북만 있으면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CEO 집무실도 없다. 발버그 CEO도 집에 마련한 사무공간이나 커피숍에서 일한다. 비싼 사무실 임차료를 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가상의 업무 공간을 활용한 경험을 소프트웨어 개발에 녹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미국뿐 아니라 아르헨티나, 영국, 이스라엘, 나이지리아, 호주 등 다양한 시간대에 살고 있는 모든 직원이 원격 근무를 하다 보니 시차도 뛰어넘어야 한다. 미국 동부시간 기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를 공식 업무시간으로 정했다. 이 시간 동안에도 자율적으로 일할 수 있다. 마크 프레인 인비전 최고인사책임자(Chief People Officer: CPO)는 “인터넷프로토콜(IP) 주소가 어디에 있는지, 특정 시간에 일을 하는지가 아니라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내는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원격 근무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선 ‘모 아니면 도(all or nothing)’ 식의 양자택일이 필요하다고 프레인 CPO는 말했다. 그는 “매일 아침 사무실로 걸어 들어가는 선택지가 아예 없어야만 직원들은 원격 근무제에 적응하는 저마다의 방식을 찾아내게 된다”고 설명했다.

디자이너와 조직 전체를 연결

프레인 CPO는 원격 근무에서도 협업을 위해선 ‘라포(rapport·상호신뢰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직원들이 서로 업무에 대해 많은 질문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회사가 장려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한다.

물리적 접촉도 필요하다. 지난해 2월엔 모든 직원이 모여 1주일간 워크숍을 열었다. 프레인 CPO는 “몇 년간 함께 일하면서 서로 만난 적이 없었던 직원들이 얼굴을 마주하며 울고 웃었다”고 전했다.

미국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전문매체 패스트컴퍼니는 인비전이 사용자를 빠르게 늘린 비결은 수익모델에 있다고 평가했다. 5명 이하의 디자이너로 이뤄진 팀에서 한 달에 100달러를 내면 프로토타입을 무제한으로 공유할 수 있다. 다른 부서 직원들이 의견을 남길 수 있는 시스템은 1인당 8달러만 추가로 내면 한 달간 사용할 수 있다.

투자에 참여한 스파크캐피털의 메건 퀸 제너럴파트너는 “이 같은 수익모델이 조직 안에서 날개를 달지 예상하지 못했다”며 “디자이너들은 협업하거나 승인을 받기 위해 팀원뿐 아니라 다른 부서의 직원들을 초대했다”고 말했다. 조직에 디자이너가 몇 명 있는지가 아니라 디자이너들이 조직 내 직원 몇 명과 연결돼 있는지에 따라 수익을 늘릴 수 있는 구조라는 설명이다.

추가영 기자 gych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