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대우 붕괴로 산은 관리…분식회계·부실관리·관치금융 얼룩
'밑빠진 독' 물 부은 朴정부 '서별관회의' 수사대상 오르기도

31일 현물출자 방식으로의 민영화가 전격 발표된 대우조선해양에는 혈세(血稅), 즉 '국민의 피같은 돈'이 어마어마하게 투입됐다는 비난이 늘 따라다녔다.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과 함께 국내 조선업계 '빅3 체제'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 뒤에선 줄잡아 10조원 넘는 공적 자금지원이 받쳐줬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대규모 분식회계가 저질러지고, 전직 사장들과 최대주주인 산은 회장이 줄줄이 사법처리되는 일도 겪었다.

대우조선의 어두운 세월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로 대우그룹이 공중분해를 시작한 1999년부터다.

대우중공업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대우조선공업, 대우종합기계, 대우중공업으로 분할했다.

대우조선공업이 현재의 대우조선이다.

산은은 2008년 대우조선 매각 방침을 발표했다.

우선협상대상자로 한화가 선정됐다.

그러나 시기가 문제였다.

2008년 전 세계를 덮친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한화는 이듬해 인수 포기를 선언했다.

대우조선의 위기는 201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했다.

해운·조선업황 침체로 선박 수주가 줄고, 국내외 업체들과의 저가수주 경쟁으로 수익성이 악화했다.

안에서는 산은의 부실한 관리, 경영진의 분식회계, 강성 노동조합의 구조조정 반발로 곪아갔다.

결국 2015년 4조2천억원의 대우조선 지원이 결정됐다.

산은이 2조6천억원, 수출입은행이 1조6천억원의 신규자금을 투입하는 것으로, 당시 결정은 청와대 '서별관회의'를 거쳤다.

대우조선의 상황은 악화일로였다.

그러자 불과 2년 만인 2017년 추가지원이 이뤄졌다.

신규자금만 2조9천억원이 더 투입됐고, 출자지원 2조9천억원이 얹어졌다.

적게는 7조원, 많게는 10조원이 자본잠식에 빠진 대우조선을 살리려고 들어간 셈이다.

대우조선이 이처럼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배경에는 5조원 규모의 분식회계가 있었다.

분식을 걷어내자 대우조선은 2015년 상반기에만 3조1천억원의 적자를 낸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대우조선은 직원 격려금으로 1천200억원을 줬다.

노조는 인력 구조조정에 저항했고, 임종룡 당시 금융위원장은 인력 구조조정에 대해 "부진한 게 사실"이라고 했다.

정성립 대우조선 사장은 국회 청문회에서 "(인력 감축 등) 자구계획을 지키지 못하면 옥포 앞바다에 빠져 죽겠다"고 울먹였다.
10조원 혈세먹은 대우조선, 20년만에 산은 품 떠날까
대우조선 경영진, 그리고 대우조선의 최대주주 산은 경영진은 '대우조선 비리 사태'에 줄줄이 연루됐다.

남상태·고재호 전 사장이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강만수 전 회장은 남 전 사장의 비리를 눈감아주는 대가로 부당한 압력을 행사해 역시 교도소 신세를 졌다.

산은은 공적자금을 투입한 다른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대우조선에도 내부 임원을 최고재무책임자(CFO)로 내려보냈다.

'낙하산 인사'라는 비판에 '경영 감시'라는 명분으로 맞섰지만, 산은 출신 CFO는 대우조선의 분식회계를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비난 속에 수조원의 자금지원을 강행한 것은 정권 차원의 결정이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임종룡 금융위원장, 안종범 경제수석비서관, 홍기택 산은 회장 등이 청와대 서별관에 모여 대우조선 자금지원을 결정한 사실이 드러났다.

대우조선 파산의 여파 등을 고려하면 당시의 결정이 배임에 해당하기는 어렵다고 보고 검찰이 무혐의 처분을 내렸지만, 기업 구조조정에 정권 수뇌부와 정부 부처가 깊숙이 개입하는 '관치금융'의 단면을 드러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기업 부실을 둘러싼 정·관·재계의 복마전 같은 난맥상을 뒤로하고 대우조선이 현대중공업 주도의 새 지주회사로 편입되면 약 20년 만에 민영화에 성공하게 된다.

금융권 관계자는 "정부와 채권단이 20년 동안 데리고 있어 보니 결론은 '안 된다'는 것"이라며 "국내 과당경쟁을 극복하고 중국의 추격을 뿌리치려면 한시라도 빨리 대우조선을 민간 영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