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재업이나 소매유통업은 오랜 역사를 지닌 산업이다. 이곳에서 남보다 뛰어난 경쟁력을 갖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경호 영림목재 회장은 목재업에 연구개발과 벤처 개념을 도입해 끊임없이 신제품 개발에 나서고 있다. 박종업 성남보물창고 대표는 ‘생활용품의 모든 것’을 표방하며 나만의 경쟁력을 갖춰가고 있다. 이들은 틈나는 대로 소외된 이웃을 돕는 기업인이기도 하다. 이들의 경영 노하우를 들여다봤다.
박종업 성남보물창고 대표(왼쪽)와 부인인 원근순 씨가 매장에서 주방제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박종업 성남보물창고 대표(왼쪽)와 부인인 원근순 씨가 매장에서 주방제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노점상 출신이 유통업으로 성공해 이젠 불우이웃을 돕는 기업인이 됐다. 경기 성남시 태평동 중앙시장 옆 현대시장에 있는 성남보물창고의 박종업 대표(64)다. 그는 매달 200만원을 이 지역 어려운 환경의 중·고등학생에게 장학금으로 준다. 20명에게 1인당 10만원씩이다. 그는 2015년 1억원 이상 개인 고액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그가 운영하는 성남보물창고는 생활용품 종합할인매장이다. 매장면적 1320㎡, 종업원 17명의 중형마트다. 대형마트가 속속 진출하면서 중형마트는 점차 설 자리를 잃고 있다. 하지만 이 매장은 예외다. 박 대표는 “주말엔 평균 2000명, 주중엔 1300명 안팎이 찾는다”며 “대부분 성남 시민이지만 인근 경기 광주 등지에서도 찾아온다”고 말했다. 고객 중엔 단골이 많다. 박 대표는 “성남에서 살면서 단골이 됐는데 곤지암으로 이사 간 뒤에도 우리 매장을 찾아오는 고객이 있다”고 덧붙였다.

박종업 성남보물창고 대표, 3만종 생활용품 빼곡…단골 늘려가는 중형마트 강자
대형마트가 곳곳에 있는데도 굳이 이 매장을 찾는 까닭은 무엇일까. 매장 안에 들어서면 의문이 어느 정도 풀린다. 그릇 도자기 냄비 프라이팬 공구 매트에서 황금돼지저금통까지 약 3만 종의 생활용품이 진열돼 있다. 한마디로 만물상이다. 예컨대 공구 코너에 가면 ‘다용도 맥가이버칼’이 있다. 통조림따개 칼 십자드라이버 가위 등 7가지 기능을 가진 제품이다. 가격은 6500원이다.

그렇다고 저가 제품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독일 프랑스 영국 일본제 식기 도자기 그릇도 있다. 박 대표 경영의 특징은 두 가지다. 그는 “질 좋은 제품을 적은 마진(이익)을 보고 판다는 점과 고객이 원하는 제품은 거의 다 갖췄을 정도로 폭넓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유통 인생은 파란만장하다. 전북 부안에서 태어난 박 대표는 건어물 장사를 하던 부친을 따라 어릴 적부터 5일장을 돌아다녔다. 부안 김제 정읍 일대다. 10대 때부터 장사에 눈을 뜬 셈이다. 군생활을 마친 뒤 경남 마산에서 노점상을 했다. 1990년대 초 결혼 후 아내와 함께 서울 신촌로터리에서 또다시 노점상을 열었다.

수년간 길거리 상점을 전전한 그가 처음으로 가게를 마련한 것은 1990년대 중반 인천 간석역 부근이었다. ‘깔세’로 130㎡ 규모의 가게를 얻어 생활용품 유통을 시작했다. 깔세는 보증금 없이 월세만 내고 입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임차인이 나타나면 가게를 즉각 비워주는 조건이다.

얼마가 지났을까. 비가 억수로 내리던 어느 여름날. 때마침 만조가 겹쳤다. 매장은 순식간에 물바다로 변했다. 생활용품과 의류 양말 등이 흙탕물 위를 둥둥 떠다녔다. 망연자실했다.

이번엔 경기 군포시 산본으로 옮겼다. 보증금 1억원에 지하 매장을 빌렸다. 하지만 외환위기가 덮치면서 건물주가 부도를 내자 보증금이 허공으로 사라졌다. 어렵사리 위기를 극복하고 성남으로 이전했다. 그때가 2001년 3월10일. 번듯한 매장을 열었지만 얼마 뒤 이웃 건물에 발생한 대형 화재가 매장을 덮쳤다. 주위에선 “도망가라”고 조언했을 정도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채권자들을 설득해 “반드시 재기할 테니 상품을 공급해달라”고 호소했다. 약 5개월 뒤 다시 매장을 열었다. ‘불난 집은 번성한다’는 속설처럼 성남보물창고는 그 뒤 승승장구의 길을 걸었다.

그는 경영을 하면서 정한 원칙이 있다. ‘직원에게 희망을 주자’는 것이다. 독립을 원하는 직원이 있으면 발품을 팔아가며 적당한 매장을 알아봐주고 자신의 가계수표로 초도 물량을 확보해 줬다.

그가 남을 돕는 것은 뽐내기 위한 게 아니다. 단지 자신이 배고팠던 시절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김낙훈 중소기업전문기자 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