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전희성 기자 lenny80@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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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그 맥밀런 월마트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CNBC방송 인터뷰에서 스마트폰에 있는 사진 한 장을 공개했다. 1950년대부터 2017년까지 10년 단위로 정리한 미국 10대 유통업체 순위를 기록한 사진이었다.

사진 속 리스트에서 월마트는 1990년대부터 꾸준히 1위에 이름을 올렸다. 반면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1위를 고수하던 시어스는 2010년 10위로 추락한 뒤 2017년 리스트에서는 자취를 감췄다. 같은 시기 시장을 주름잡던 포춘, 브라운 슈 등도 현재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그가 사진을 갖고 다니는 이유는 월마트도 한순간 몰락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상기하기 위해서다. 미국 유통업계를 주름잡는 1위 기업 CEO지만 시대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겠다는 생각에서 사진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맥밀런 CEO는 당시 인터뷰에서 “많은 기업이 탄생했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다”며 “유통기업들의 주기는 더 빠르다”고 했다. 이어 “경쟁사보다 앞서기 위해 건강한 편집증을 가져야 한다”며 “계속 성장하는 기업들도 변화하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 몰락하기 마련”이라고 했다.

알바에서 CEO까지

맥밀런 CEO는 월마트 물류창고 파트타임 직원에서 CEO까지 승진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는 아칸소대 입학을 앞두고 있던 1984년 여름 월마트 물류창고에서 트럭 물건을 내리는 임시직으로 일했다. 1990년에는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같은해 오클라호마주에 있는 월마트 유통센터 스포츠용품 구매 보조직으로 입사했다. 입사 후 식품, 의류, 공예품, 가구, 유아용 상품 등 여러 부문에서 근무했다. 월마트 계열 할인매장 샘스클럽에서도 장난감, 전자, 스포츠 용품 상품 관리자로 일했다.

맥밀런은 이후 승진을 거듭해 2006년 자신이 직원으로 일했던 샘스클럽의 영업담당 사장 자리에 올랐다. 그의 경영능력이 빛을 발한 것은 이때부터다. 맥밀런은 하청업체와 관계를 개선하고 새로운 상품을 매대에 올리는 등의 전략으로 경쟁사인 코스트코와 격차를 줄이는 데 성공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09년 월마트 해외사업부 대표 자리에 오른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다. 그의 지휘 아래 월마트는 해외 매장을 2009년 15개국 3300개에서 4년 만에 26개국 6300개국으로 크게 늘렸다. 해외 사업 매출 증가율이 미국 매출 증가율을 넘어서기도 했다. 비즈니스인사이더는 “해외 사업은 월마트의 지속적인 성장에 필요한 중요한 부문”이라며 “그가 해외 사업부를 맡았다는 것은 미래 CEO가 된다는 징후였다”고 전했다.

그는 해외 사업을 성장시킨 성과를 인정받아 입사 24년 만인 2014년 2월 CEO로 취임했다. 당시 47세로 월마트 역사상 최연소 CEO였다. 롭슨 월튼 월마트 이사회 의장은 “맥밀런은 사업 전반에서 리더십을 보여줬다”며 “트렌드를 잘 읽어내는 폭넓은 경험을 가졌다”고 설명했다.

맥밀런이 취임했던 시기는 월마트가 급성장하는 전자상거래업체 아마존에 밀려 앞날이 불투명했던 때였다. 대다수 미국 언론들이 ‘아마존 정글’에서 유통업체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있다는 분석을 잇따라 내놨다. 월마트 역시 2010년대 들어 매출 증가율이 0%대에 머무는 등 성장이 정체돼 있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다른 유통기업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는 우려가 많았다. 맥밀런 CEO는 하버드비즈니스리뷰와 인터뷰에서 “월마트는 5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회사지만 세상은 급변하고 있다”며 “많은 이들이 회사의 근본적인 변화를 주문했다”고 털어놨다.

시어스와 아마존에서 배운 전략

월마트 CEO에 오른 그는 미국 최대 백화점 체인인 시어스의 1908년 상품 구성 목록을 살펴봤다. 111년 전 시어스가 폭넓은 상품 구성과 카탈로그로 상품을 미리 보여주는 혁신적인 마케팅으로 고객을 끌어모으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배웠다. ‘20세기 아마존’ 시어스에 대한 분석을 마친 그는 제프 베이조스의 아마존을 심도있게 분석한 책을 임원들에게 읽게 하고 토론을 했다. 과거 혁신을 이끌었던 기업과 현재의 혁신 기업을 함께 살펴보면서 통찰을 얻고자 한 것이다.

맥밀런은 CEO로 취임한 다음해 전자상거래 부문에 100억달러 이상 과감한 투자를 했다. 이후 매년 10억달러를 쏟아부었다. 뿐만 아니라 꾸준한 인수합병(M&A)으로 부족한 온라인 인프라를 확대해 나갔다. 2016년에는 저렴한 값에 물건을 판매해 인기를 끌었던 제트닷컴을 33억달러에 인수했다. 2017년부터 의류·액세서리 전자상거래업체 모드클로스, 아웃도어 의류업체 무스조, 남성복 기업 보노보스, 여성 속옷 판매업체 베어네세시티 등을 사들였다.

맥밀런은 온라인에만 집중하지 않았다. 아마존이 가지고 있지 않은 탄탄한 오프라인 유통 매장을 장점으로 활용하기 위해 신선제품 판매를 확대했다. 신선제품은 온라인으로 판매하기 힘든 품목이다. 맥밀런은 “유통업계는 기본적으로 지역 시장에 의존하고 지역 업체로부터 상품을 공급받고 있다”며 “식품은 규모보다 속도가 생명”이라고 했다. 이어 “의류와 일상용품은 이보다 세계적인 단위로 움직인다”고 했다.

맥밀런이 편 전략은 아마존과 시어스를 분석한 결과라는 시각이 많다. 또 그의 빠른 의사 결정이 힘을 발휘했다는 평가도 있다. 월마트는 과거에는 중요한 전략적 선택을 1년에 한 번, 또는 분기별로 한 번 내렸다. 하지만 맥밀런 CEO가 취임한 뒤에는 거의 하루 단위로 전략을 결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온라인 날개를 단 월마트 매출은 지난해 5003억달러로 늘었다. 이전 3년간 4800억달러 안팎에 머물던 박스권에서 단숨에 벗어난 것이다. 월마트는 지난해 온라인부문 사업 매출 증가율이 40%에 달한 것으로 추정했다. 아마존에 밀려 무너질 것이라는 세간의 우려를 불식시킨 것이다.

아직 넘어야 할 산은 많다. 시장조사업체 이마케터에 따르면 월마트는 지난해 온라인 쇼핑 점유율 4%를 차지한 것으로 분석됐다. 3.9%를 차지한 애플을 넘어 3위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48%의 압도적인 점유율로 1위를 고수한 아마존엔 한참 못 미친다.

지금도 아마존발(發) 유통기업들의 위기는 계속되고 있다. 미국 경기가 호조를 보였던 지난해에도 125년 전통의 시어스를 포함해 18개 소매 기업이 법원에 파산 보호를 신청했다. 2017년에도 22개 소매 기업이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블룸버그통신은 “소매업계 아포칼립스(대재앙)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김형규 기자 k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