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걸들의 호령…보수적인 금융계 '유리천장'이 깨진다
남성 중심인 금융업계에 여성의 고위직 진출이 빠르게 늘고 있다. 연말 인사에서 증권업계 첫 여성 최고경영자(CEO)가 탄생한 데 이어 은행에서도 여성 임원이 잇따라 배출되고 있다. 금융계에선 그간 견고했던 ‘유리천장(여성의 고위직 진출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깨지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 여성 금융인이 증가한 만큼 여성 임원도 당연히 늘어나고 있는 데다, 양성평등의 수준이 더 높아져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도 형성되고 있어서다.

능력 앞세워 유리천장 깨트려

외환위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금융계에서 여성들은 ‘찬밥’ 신세였다. 여성이 결혼하면 금융회사에서 퇴직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 여성의 진출이 늘면서 2000년대 들어선 팀장 부장을 다는 여성도 많아졌다. 2013년 말엔 첫 여성 은행장이 탄생했다. 권선주 전 기업은행장이 그 주인공이다. 지난해 초엔 김해경 KB신용정보 부사장이 KB신용정보 사장에 올랐다.
여걸들의 호령…보수적인 금융계 '유리천장'이 깨진다
상업고 출신 여성은 금융사에서 더 어려운 여건을 이겨내야 했다. 여성에다 고졸이란 차별을 모두 극복해야 했기 때문이다. 왕미화 신한은행 부행장보(부산진여상), 조경선 신한은행 부행장보(영등포여상)는 이번에 두 가지 차별을 모두 이겨내며 은행 임원 반열에 올랐다. 앞서 11월 말 충주여상 출신인 정종숙 우리은행 상무도 부행장보로 승진했다. 이들은 모두 능력으로 편견을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 부행장보는 “차별화된 영업력을 인정받은 것이 승진의 비결 아니겠냐”며 “영업본부장 때에는 핵심성과지표(KPI) 전국 1위를 3회 연속 달성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왕 부행장보는 신한은행 첫 여성 PB팀장이다. 강남PB센터에서 4명의 PB팀장 중 유일한 여성이던 그에게는 신규 고객이 찾아오지 않았다. 남성 PB가 왠지 더 신뢰가 간다는 편견은 고액자산가들일수록 더욱 심했다. 팀장에 오른 지 3년이 지난 2006년 그가 다루는 자산은 어지간한 지점의 운용 규모와 맞먹는 2000억원에 달했다. 연평균 50~60%에 이르는 수익률을 냈기 때문이다. 왕 부행장보는 “남과 다른 차별화 전략을 내세운 것이 좋은 평가를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왕 부행장보는 “오로지 남자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편협한 마음으로 직장생활을 했던 때도 있었다”며 “하지만 후배들이 성별이 아니라 능력으로 승부하면서 균형적인 감각과 마음의 여유를 갖고 리더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울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직급은 부행장보이지만 그룹 WM(자산관리)부문장을 맡아 부행장급 역할을 한다.

증권업계 최초 여성 CEO 탄생

박정림 국민은행 부행장은 KB증권 사장에 내정돼 ‘첫 여성 증권사 CEO’를 예약했다. 박 사장 내정자는 KB금융그룹에서 화통한 성격과 꼼꼼한 업무관리로 무장한 여걸로 불린다.

서울대 경영대를 졸업한 뒤 체이스맨해튼, 정몽준 의원실 비서관, 조흥은행, 삼성화재 등을 거치며 쌓은 국내외 인맥도 화려하다. 2004년 국민은행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리스크관리 및 자산관리 전문가로 고속 승진하며 ‘유리천장’을 차례로 깨부쉈다. 지난해 1월부터는 KB금융지주 총괄부사장, 국민은행 부행장, KB증권 부사장 등 3개 법인의 WM 사업총괄 임원을 겸직할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다.

박 내정자는 “여자여서 못한다는 소리를 들어선 안 된다는 책임감이 크다”며 “여자들은 시키는 일은 잘하는데 배짱이 약하다는 인식을 깰 수 있도록 계속 새로운 도전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금융사들도 여성 리더 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신한금융은 여성을 특정 업무에 배치하는 데 대한 어려움,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 경력단절 등의 문제를 해결하고 여성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지난 3월 그룹 차원에서 여성리더 프로그램인 ‘신한 쉬어로즈’를 출범시켰다.

국민은행도 사내 연수와 특정 부서 전입 공모 시 여성을 우대하고 있다. 조 부행장보는 “멘토링을 받은 후배들이 또 멘토가 돼 여성 후배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순신 기자 soonsin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