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의 강요에 의해 은행들이 취약차주의 대출원금을 최대 45%까지 감면해주는 채무조정제도 도입이 추진되고 있다. 금융당국은 기초수급자 장애인 등 사회 취약계층과 실업 폐업 질병 등으로 어려움에 빠진 차주들에게 은행들이 원금을 깎아주라고 압박하고 있다. 은행들은 공식적으로는 금융당국의 뜻에 반하는 논평을 내놓지 않고 있다. 하지만 정부가 세금으로 할 일을 은행에 떠넘기고 있다고 속을 끓이고 있으며, 이 제도가 도입되면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도덕적 해이가 기승을 부릴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취약계층 빚 45% 감면…도덕적 해이 불 보듯
금감원 “은행들 돈 많이 번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5일 “은행들과 함께 ‘은행권 취약차주 부담 완화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은행 신용대출 원금이 월 소득의 35배가 넘는 취약차주들에게 대출원금의 최대 45%를 감면해주는 것이 골자가 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르면 내년 초부터 시행에 들어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금융당국은 취약차주가 빚을 갚지 못해 신용회복위원회나 법원의 채무조정에 들어가기 전 은행 차원에서 미리 채무를 조정해 주는 방안을 짜고 있다. 금융당국의 한 관계자는 “기업이 어려워지면 법정관리 등으로 가기 전 채무 조정을 하는 제도가 있지 않으냐”며 “올해 막대한 이익을 올리고 있는 은행들이 취약차주들 원금을 깎아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금감원은 대출 약관에 실업질병 등으로 상환에 어려움을 겪는 차주의 은행에 대한 채무조정 요청권을 신설하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채무조정 대상의 세부적인 기준과 감면 한도 등은 은행 등과 더 논의하고 최종 결론을 내겠다는 게 금감원의 방침이다. 더불어 일시적 유동성 위험에 처한 차주를 돕는 차원에서 기한이익 상실 시점도 연장할 계획이다. 기한이익 상실 시점이 연장되면 은행이 만기 전 원금 회수에 착수하는 시점이 늦춰진다.

은행 “성실히 갚는 사람들 역차별”

은행 관계자들은 대놓고 말은 하지 않지만 이 방안이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에 이은 전형적인 포퓰리즘 정책이라고 보고 있다. 한 은행 임원은 “취약차주를 돕는 것은 정부가 할 일”이라며 “자영업자 부담을 줄여준다고 카드사로 하여금 수수료를 덜 받으라는 것과 같은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은행들은 심각한 부작용도 우려하고 있다. 우선 꾸준히 원리금을 갚아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역차별 문제가 생긴다고 비판했다. 또 ‘어려운 사람은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도덕적 해이를 금융당국이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한 시중은행 부행장은 “대상이 되는 취약차주는 물론 차상위 계층도 빚을 갚지 않거나 소득을 줄여 원금을 탕감받으려 할 것”이라며 “신용회복위원회의 워크아웃제도, 법원의 개인회생·파산제도 등 이미 부채를 줄여주는 서민금융 지원제도가 있는데 임의적 기준을 세워 또 채무를 탕감해주면 신용질서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시중은행의 임원은 “채무자의 사정변경으로 인한 손실을 계약과 상관없이 은행이 모두 책임지는 것은 사적계약의 원칙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취약계층이 금융 사각지대로 내몰릴 것이라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한 지방은행 관계자는 “은행들은 앞으로도 채무탕감 요구를 받을 수 있는 취약계층에 대해선 신규 대출 자체를 내주지 않을 것”이라며 “2금융권마저 취약차주를 거절하면 급전이 필요한 이들은 결국 불법 사채 시장으로 내몰릴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김순신/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