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세계 기축통화인 미국 달러에 맞서 유로화의 사용 범위를 넓히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보호무역을 강화하는 등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에 대응해 EU의 경제적 주권을 지켜야 한다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EU가 에너지, 원자재, 항공기 제조 등 전략 분야에서 유로화 결제를 늘리는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고 4일 보도했다. EU 집행위원회는 이 방안을 5일 공식 발표할 계획이다.

FT가 입수한 초안에 따르면 EU는 에너지 수출·입 거래에서 유로화를 이용할 것을 권장한다는 방침이다. 현재 EU가 수입하는 에너지의 80% 이상이 달러로 결제된다. 에너지 이외 상품은 달러화와 유로화 결제 비중이 각각 45%로 비슷한 것과 대조적이다.

EU는 또 금융 거래에서도 유로화 사용을 늘려갈 계획이다. 이를 위해 일부 파생상품 거래에 대해 유로화를 이용하는 청산기구를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국제 결제수단으로 유로화를 사용하고자 하는 아프리카 국가를 기술적으로 지원하고, 유로화 표시 대외 차관을 늘리는 방안도 포함됐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 정책으로 EU의 경제적 자주권을 강화할 필요성이 높아졌다고 FT는 분석했다. 수입품에 대한 고율 관세 부과 등 미국이 보호무역을 강화하면서 EU의 수출이 영향을 받는 등 경제적 위협이 커졌다는 것이다.

미국이 이란 핵합의(JCPOA)에서 탈퇴하고 이란을 상대로 한 경제 제재를 재개한 것도 EU가 유로화 위상 강화를 추진하는 배경이다. 미국은 이란과 거래하는 제3국 기업도 제재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그럴 경우 이란과 거래가 많은 유럽 기업들이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이에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이란 핵합의 당사국인 유럽 국가들은 미국의 제재를 피해 이란과 결제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다. EU는 5일 유로화 위상 강화 방안을 발표한 뒤 이달 하순 브뤼셀에서 열리는 회원국 정상회의에서 논의할 예정이다.

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