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층 빌딩이 즐비한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 전경. 도시의 상징이자 말레이시아 최고층 빌딩인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오른쪽) 중 한 동은 삼성물산의 ‘작품’이다. /GBP인터내셔널
고층 빌딩이 즐비한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 전경. 도시의 상징이자 말레이시아 최고층 빌딩인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오른쪽) 중 한 동은 삼성물산의 ‘작품’이다. /GBP인터내셔널
“한국과 일본에서 배우겠다.”

15년 만에 재집권한 마하티르 모하맛 말레이시아 총리가 지난 5월 취임 일성으로 한 말이다. 1981년부터 22년간 집권하며 말레이시아의 산업화를 일군 그는 ‘동방정책’을 재천명하고 ‘탈(脫)중국’을 선언했다. 중국 기업이 진행하던 대규모 프로젝트도 줄줄이 중단시켰다. 15조원 규모의 동부해안철도(ECRL) 사업이 대표적이다.

대신 자국 산업 육성을 통해 2020년까지 선진국가로 도약하겠다는 ‘비전 2020’을 발표했다. 한국과 일본을 ‘교과서’로 삼겠다고 했다. 지난 14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한·아세안 정상회의에서 마하티르 총리는 “한국은 한때 아시아의 은둔국가로 평가받았으나 이제는 아시아 경제 발전에서 선두를 달리는 첨단국가로 성장했다”며 “성장 비결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일본 세 번 방문한 마하티르 총리

‘93세 노장’의 귀환에 일본 정부와 기업은 연일 들썩이고 있다. 마하티르 총리가 일본에 ‘투자 러브콜’을 보낸 데 따른 말레이시아 진출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마하티르 총리는 취임 후 일본을 세 차례나 방문해 “일본을 영예로운 손님으로 대하겠다”고 치켜세웠다. 일본은 과도한 부채로 어려움을 겪는 말레이시아에 2조원 규모의 자금을 지원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양국 간 ‘신(新)밀월관계’가 형성됐다. 1980년대 이래 말레이시아 제조업 분야에 집중 투자해온 일본은 최근 몇 년간 중국의 ‘머니 폭탄’에 고전하던 터였다. 일본 기업들은 말레이시아의 우주 항공, 신재생에너지 등 신사업 분야에서 협력을 추진 중이다.

말레이시아는 '이슬람 시장 관문'…할랄에 韓流 결합땐 시너지 커
일본이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분야 중 하나는 할랄(무슬림이 먹고 쓸 수 있는 제품) 시장이다. 말레이시아는 이슬람 경제의 ‘테스트 마켓’으로 불린다. 전체 인구의 60%가량이 무슬림이고,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만703달러(올 10월 기준)로 아세안 10개국 중 3위다. 말레이시아에서 통하면 18억 명에 달하는 전 세계 무슬림 시장도 잡을 수 있다는 의미다.

말레이시아의 할랄 인증 제도인 ‘자킴(JAKIM)’은 세계 최고 권위로 인정받고 있다. 일본은 2015년 말레이시아 정부 기관의 도움을 받아 할랄 지원 시스템을 도입했다. 일본에 할랄 문화 거리가 생기는 등 할랄 문화가 보편화되면서 일본 기업들의 할랄 시장 진출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한류와 할랄 결합 마케팅 필요

한국에선 마하티르 총리의 동방정책에 호응할 만한 눈에 띄는 조치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한국은 말레이시아와의 교역 규모가 168억달러(2017년 기준)로 아세안 10개국 중 네 번째지만 베트남(640억달러)에 비하면 한참 못 미친다. 신남방정책을 추진 중인 정부 부처에서 “말레이시아 보고서를 채울 만한 아이템이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할랄 시장 진출도 걸음마 수준이다. 일본과 달리 정부 차원의 체계적인 지원 시스템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업계에선 이슬람 경제가 한국 경제의 ‘블루오션’이 될 것이란 분석이 많지만 국내에 퍼져 있는 반무슬림 정서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슬람 국가에서 자본을 조달하기 위해 발행하는 채권인 수쿠크 도입이 이명박 정부 때부터 논의됐지만 결국 좌절됐다.

전문가들은 말레이시아에 불기 시작한 한류 열풍과 할랄을 결합한 진출 전략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가능성은 충분하다. 신세계푸드와 현지 기업 마미가 합작해 출시한 ‘대박라면’이 말레이시아에서 히트를 쳤다. 아모레퍼시픽은 말레이시아 할랄 인증을 받은 화장품을 생산하기 위해 2020년 완공을 목표로 조호바루에 공장을 짓고 있다. 다토 세리 자밀 비딘 할랄산업개발공사 대표는 “할랄 시장을 잡으려면 시스템을 이해하고 정부 차원의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며 “한국은 코스메틱과 농식품 분야에 강점이 있다”고 조언했다.

말레이시아는 정보통신기술(ICT), 인공지능, 사물인터넷(IoT) 등 4차 산업혁명 주요 분야에서 한국의 주요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2010년 현지 기업 타이탄을 1조5000억원에 인수하면서 말레이시아에 진출한 롯데케미칼타이탄의 이동우 대표는 “기술 노하우가 있어도 기반 환경과 사람이 안 따라주면 쓸모가 없다”며 “말레이시아는 신규 사업에 투자하거나 증설할 때 세제혜택 등 지원책이 합리적으로 갖춰져 있고, 인력 수준도 평균 이상”이라고 말했다.

말레이시아 총리의 한국 방문은 2011년이 마지막이다. 한국 대통령은 2015년 박근혜 대통령이 아세안 정상회의 참석차 방문한 게 마지막이다. 정부가 문재인 대통령의 싱가포르 아세안 정상회의 순방을 계기로 추진한 양자 정상회담은 성사되지 못했다. 정부 당국자는 “내년 서울에서 정상회담을 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쿠알라룸푸르= 김채연 기자 why2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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