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7일 국민연금 개편안을 전면 재검토하라고 돌연 지시한 배경을 두고 정치권과 정부 안팎에서 여러 해석이 나돌고 있다. 일각에선 노무현 정부 때 터진 ‘안티 국민연금 사태’ 트라우마 때문이란 얘기가 나온다. 최근 연금개혁을 추진한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대규모 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대통령 지지율이 폭락한 것도 영향을 미친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된다.

안티 국민연금 사태란 2004년 온·오프라인에서 벌어진 보험료 납부 거부 운동을 말한다. 정부가 연금 개편을 통해 9%인 국민연금 보험료율을 15.9%로 올리려 하자 한국납세자연맹 등의 주도로 촛불집회가 열렸다. 인터넷에선 ‘기금이 이미 고갈됐다’ ‘적립된 돈은 정부가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식의 헛소문까지 돌면서 국민연금 반대 여론이 급격히 확산됐다. 집권 1년차인 2003년 60%대였던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은 이듬해 말 28.8%까지 떨어졌고, 연금 개편은 없던 일이 됐다.

이번 국민연금 개편안을 두고도 온라인에서 네티즌의 반발이 거셌다. 6일부터 언론을 통해 ‘보건복지부가 마련한 세 가지 초안 모두 보험료율을 인상하는 내용’이라는 게 알려지자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국민연금 폐지 등을 주장하는 글이 150건 넘게 올라왔다.

여권 한 관계자는 8일 “안티 국민연금 사태 당시 문 대통령은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으로서 갈등 조정이 주요 업무였다”며 “연금개혁에 대한 국민 반발을 직접 눈으로 지켜봤기 때문에 이번 일도 예사롭지 않게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병준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이날 문 대통령의 재검토 지시와 관련, “이제 와서 다시 또 퇴짜를 놓느냐”며 “결국 인기 없는 개혁은 안 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연금개혁이 지지율 하락이라는 역풍으로 이어지는 사례는 해외에서도 여럿 있다. 러시아는 올 6월 남성의 연금 수급 연령을 2028년까지 60세에서 65세로, 여성은 2034년까지 55세에서 63세로 늦추는 내용의 연금 개편안을 발표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3월 대선 당시 득표율은 76.7%였다. 하지만 연금 개편안을 발표한 뒤 지지율이 40%대로 떨어졌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내년과 2020년 연금 지급액을 물가 상승률보다 낮은 0.3%씩만 올리겠다고 발표했다. 물가를 감안하면 연금을 사실상 깎겠다는 것이다.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한 방안이지만 노년층을 중심으로 반대 여론이 거셌다. 마크롱 대통령의 지지율은 작년 5월 취임 직후 60%대였지만 최근 20%대까지 낮아졌다.

이태훈 기자 bej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