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의 관심은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주)LG 최대주주가 된 데 있는 게 아니라 7000억원이 넘는 상속세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지로 쏠렸다.”
지난 2일 구 회장이 부친인 고(故) 구본무 회장의 (주)LG 보유 지분 8.8%를 물려받으면서 사상 최대 규모의 상속세를 물게 되자 과도한 한국의 상속세율을 둘러싼 논란이 다시 불거질 조짐이다. 최대 65%(실효세율)에 달하는 ‘징벌적인’ 상속세율을 고려하면 승계를 앞둔 기업마다 거액의 상속세를 내면서도 경영권을 유지할 묘안을 찾는 게 발등의 불이 됐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4일 “구 회장은 내년부터 300억~400억원 안팎의 (주)LG 배당금과 급여를 받을 전망인 데다 (주)LG 보유 주식을 담보로 대출받을 수 있는 만큼 빠듯하게나마 상속세를 낼 수 있을 것”이라며 “LG와 달리 적자를 내거나 주식담보대출을 받기 힘든 기업이라면 상속세 폭탄에 회사를 팔 아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구 회장의 사상 최대 규모 상속세 납부 발표를 계기로 상속세 제도 개편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산업화 시대인 1960~1970년대에 문을 연 기업 중 상당수가 2~4세에게 경영권을 물려줘야 할 시점을 맞았지만, 세계에서 가장 높은 상속세율 탓에 사실상 기업 승계가 막혀 있어서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한국의 상속세율은 ‘경쟁력 있는 기업을 일궈 후손에게 물려주겠다’는 기업가정신 자체를 부정한다”고 꼬집었다.
과도한 상속세 부담이 경제 활력을 저하시킨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는 오히려 세 부담을 높이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정부가 지난해 7월 발표한 ‘100대 국정과제’에는 고소득자 과세 강화 방안으로 상속·증여세 신고세액공제율 축소가 담겼다. 이 같은 방침은 2017년 세법개정안에 그대로 반영됐다. 상속·증여세를 기간 내 신고하면 세액의 7%를 상속·증여세액에서 공제해주는 신고세액공제가 올해 5%로 축소됐고, 내년 이후에는 3%로 줄어든다.참여연대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 시민단체도 정부에 상속세 강화를 압박하고 있다. 참여연대는 지난 3월 기획재정부에 제출한 세법개정 건의서에서 상속세 일괄공제 금액을 현행 5억원에서 3억원으로 낮출 것을 제안했다. 가업상속공제도 최대 500억원까지 돼 있는 공제한도를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실련은 아예 가업상속공제 제도 자체를 폐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시민단체들의 이 같은 주장은 향후 정부의 세제개편안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온다. 대통령 직속 재정개혁특별위원회가 지난 7월 발표한 세법개정 권고안에는 종부세율 인상, 금융소득종합과세 기준금액 하향, 주택 임대소득세 과세 등 참여연대 세법개정 건의서 내용과 거의 비슷한 방안이 담겼다. 재정개혁특위는 올 하반기 상속·증여세 개편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고 있다.정부 내에서는 중소기업에 한해 상속세 부담을 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김동연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지난달 국회 국정감사에서 ‘과도한 상속세 부담 때문에 중소기업들이 회사를 매각해 국가 경쟁력이 저하되고 있다’는 윤영석 자유한국당 의원의 지적에 “중소기업의 가업상속공제를 확대하는 방안을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곧이어 여당 의원들로부터 “가업상속공제 확대는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을 받았다.한국의 상속세는 최고세율 50%에다 최대주주 주식의 할증평가까지 더하면 최고 65%에 달해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이다. 도입 이후 1990년대까지 꾸준히 인하 추세였던 상속세율은 재벌에 대한 비판여론이 커지면서 1996년 상속·증여세법 전면 개정과 1999년 최고세율 인상 등을 거쳐 다시 올랐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과 교수는 “경제 활력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상속세 부담을 낮춰 기업들의 고용 여력을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국내 자동차 부품업체 케이유엠(KUM)은 지난 5월 미국 최대 자동차 부품업체 앱티브에 팔렸다. 현대모비스 등 자동차 전장부품회사에 자동차 커넥터(전선과 전자장비를 연결하는 부품)를 납품, 연간 220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알짜기업이었다. 이 회사 대표는 높은 상속세 부담 탓에 승계가 아니라 매각을 택했다. 지난달엔 국내 2위 화장품 용기 제조업체 펌텍코리아가 매물로 나왔다. 아모레퍼시픽 에스티로더 등 국내외 화장품업체에 화장품 용기를 공급해 지난해 기준 1300억원의 매출을 올린 업체다. 베인캐피털, 블랙스톤 등 글로벌 사모펀드(PEF) 운용사들이 대거 인수전에 뛰어들었다.경기 침체에 노동경직성 확대, 미래 상속세 부담까지 겹치면서 기업을 승계하기보다 매각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올해 1월엔 중견 가구업체 까사미아가 신세계에 회사를 팔았다. 지난해엔 밀폐용기업체 락앤락과 피임기구 제조업체 유니더스, 화장품업체 에이블씨엔씨 등 중견기업이 대주주 지분을 PEF에 매각했다. 2세 경영인인 한 중소기업 대표는 “민감한 사안이어서 공개하지는 못하지만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 중견·중소기업 경영인이 상속·증여세 탓에 승계 대신 매각을 택하고 있다”고 말했다.높은 상속세 때문에 ‘상속 이민’을 떠나야 하는 것 아니냐는 푸념도 나온다. 세부담이 작은 나라로 이민을 고민할 정도로 중견·중소기업에는 상속세가 큰 부담이다. 한국중견기업연합회가 지난해 10월부터 한 달간 125개 중견기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절반에 가까운 47.2%의 중견기업이 기업승계를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로 ‘과도한 상속·증여세 부담’을 꼽았다.장수기업을 키우기 위해 정부는 가업상속공제와 증여세 과세특례, 명문장수기업 확인제도 등을 도입했다. 하지만 요건이 까다로워 적용받은 기업이 적다. 국세청에 따르면 2016년 가업상속공제 혜택을 받은 중소기업은 60곳에 그쳤다. 가업상속공제를 받기 위해선 10년간 업종과 정규직 근로자의 80% 이상, 상속지분 100%를 유지해야 한다.높은 상속·증여세 탓에 고령의 창업주가 경영권을 쥐고 놓지 못하는 사례도 많다. 같은 이유로 중견기업의 87%는 기업승계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김규태 중견련 전무는 “고령의 창업주가 경영권을 보유하고 있는 중견기업이 전체의 38%”라며 “중견기업 세 곳 중 한 곳은 십수년 내 기업승계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했다. 승계 문제로 나오는 중견·중소기업 매물이 늘어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전설리/정영효 기자 sljun@hankyung.com
세금은 주권 국가의 중요한 요소다. ‘큰 정부’ ‘작은 정부’의 잣대도 된다. 정파의 좌우 성향을 분석할 때도 세금문제를 떼어놓고 보기는 어렵다. 세무조사의 행태만 봐도 강압적 정권인지 정말로 납세자를 아끼는 정부인지 어느 정도 파악된다. 세정(稅政)이 선진행정의 시금석이 되는 것은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이 도입하자고 주장해온 ‘디지털세’ 부과 논쟁에도 세금의 이런 속성들이 반영돼 있다. 최근 영국 재무장관이 “2020년부터 인터넷 서비스 기업을 대상으로 매출의 2%를 디지털세금으로 물리겠다”고 하면서 디지털세 논란이 다시 촉발됐다. 트럼프 정부의 고관세 정책에 맞대응하는 성격이 강한데, 이른바 ‘FANG’(페이스북 아마존 넷플릭스 구글)을 겨냥하고 있다. 이들 IT 공룡의 주력 사업모델인 인터넷 플랫폼 서비스는 이용자의 거주 지역과 매출이 생기는 곳이 다른 경우가 많은 게 특징이다.기업이 돈 버는 곳과 플랫폼 서버나 본사 위치가 다르다는 특성이 디지털세 논쟁에서 주요 쟁점이다. 더구나 매출만 보고 과세하겠다는 것인 데다 법인세와 별도로 걷는 것이다 보니 해당 기업들이 반발할 만도 하다. 미국은 상공회의소 재무부 의회가 한목소리로 반대했다. “조세협약 위반”이라고 반격하며 여차하면 ‘세금전쟁’이라도 벌일 기세다.국가 간 조세협정 문제는 우리 국정감사장에서도 나왔다. “구글 페이스북 등이 조 단위 매출을 올리면서도 세금은 제대로 안 낸다”는 국회의원들 질타가 쏟아질 때 한·미 조세조약이 현실적 벽으로 지적됐다. 그렇다고 이중과세를 피하고, 조세포탈을 방지하며, 상호투자를 장려하기 위한 이 조약 자체를 부정할 수도 없다.디지털세는 일부 유럽 국가들이 적극 나선 일종의 ‘미래세’다. 인터넷과 기술혁신을 기반으로 하는 ‘디지털경제’로 이행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건너야 할 강이다. 수시로 국경을 넘나드는 디지털경제 행위에 대해 특정 국가의 과세 주권이 어디까지, 어떤 형태로 미칠 수 있는지 국제 규범을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시대변화에 따른 세원 발굴과 과세 차원이라면 로봇세도 빼놓을 수 없다. 빌 게이츠가 “로봇의 노동에도 과세하자”고 주장하며 힘을 실었고, 유럽의 좌파 식자들이 가세하면서 유럽의회에서는 법안 초안도 만들어졌다. 로봇은 소득세를 내는 인간과 같은 권리·의무가 없어 법제화되지는 않았지만, 근래 국내에서도 로봇세 주장은 낯설지 않다.디지털세도 로봇세도 기술혁신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그래도 쉽게 꺼지지 않을 불씨다. 시대변화에 따라 이런 미래세가 필요하다면 변한 세상에 맞춰 ‘과거세’도 정비하는 게 맞다. 국내에서는 기업 승계를 막는 상속세가 그런 것 아닐까.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