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기업에 다니는 이 대리(33)는 직속 팀장 때문에 고민이다. 팀장이 리더십 상향 평가에서 회사 내 최하위권 점수를 받은 것. 그러자 평소 사이가 안 좋았던 이 대리를 겨냥해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회의 중에 “나와 사이가 안 좋은 팀원이 팀내 분란을 일으키는 것 같다”며 “인사상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이 대리를 콕 짚어 말하기까지 했다. 이 대리는 “이렇게 보복할 거면 상향 평가는 왜 하나 싶다”고 탄식했다.

인사고과는 김과장 이대리들에게 연례행사처럼 찾아오는 고비다. 성실하게 일만 하면 인사고과를 잘 받는다는 소리는 어느덧 동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얘기가 됐다. 인사고과를 앞두고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연을 김과장 이대리들에게 들어봤다.
[김과장 & 이대리] 인사고과의 계절…잠 못 이루는 직장인들
인사고과 빌미로 가욋일은 기본

경기도 한 전자부품 업체에 다니는 이 대리(34)는 요즘 회사나 집에서 틈날 때마다 어린이용 필통을 제작한다. 이 회사는 매년 연말까지 봉사활동 14시간을 채워야 한다. 별도로 시간을 내 보육기관을 찾거나 하는 식으로 봉사활동을 하는 것 외에도 필통을 하나 만들면 봉사활동 1시간을 인정해준다.

이 대리가 제작하는 필통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의 직속 상사를 위해서다. 이 대리는 이미 초등학교 과학교실로 봉사를 나가 올해 할당분을 모두 채웠다. 이 대리는 “상사가 필통을 만들어 달라고 직접적으로 요청한 것은 아니다”면서도 “인사권을 쥐고 있는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너도 나도 필통을 제작해 바치고 있어 안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직접 지시하진 않았더라도 부하 직원들이 만들어주는 필통을 사양하지 않고 받는 건 사실상 ‘대리봉사’를 해주길 채근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냐”고 하소연했다. 부하 직원들이 대신 필통을 제작해 주니 상사가 봉사활동을 나서는 일도 없다고 했다.

박 과장(35)이 다니는 대기업 계열 정유회사는 52시간 근로시간 단축 이후 사라졌던 야근이 최근 들어 부활했다. 대표에게 실별로 직접 보고하는 업적 평가가 이달 말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상무와 부서장들이 업적 평가 보고를 위한 각종 회의를 여는 바람에 퇴근시간은 계속 늦어지고 있다. 박 과장은 “평가를 위한 핵심성과지표(KPI)에서 봉사활동 부문이 작년보다 늘어나면서 주중 근무시간엔 봉사활동을 하고 주말에는 밀린 업무를 한다”며 “주 52시간 제도 때문에 초과근무 기록을 올릴 수 없어 수당도 못 받는다”고 말했다.

사내 평판 챙기랴, 실적도 올리랴

지난 상반기 중견 섬유회사에 취직한 지 사원(26)은 요즘 상사들의 ‘저녁 초대’가 피곤하다. 연말 인사평가 기간이 다가오자 상사들이 자신의 사내 평가에 대해 집요하게 묻기 때문이다. 지 사원은 “평소 친하지도 않았던 같은 팀 과장이 저녁을 사주겠다고 해서 갔더니 신입 직원들 사이에서 자신의 평가가 어떻냐고 물었다”며 “나쁜 말을 할 수 없어 좋게 대답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평가를 잘해 달라는 뜻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일도 늘어났다. 지 사원이 속한 팀의 팀장은 지난주 긴급회의를 소집해 “시킨 일은 끝까지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팀원들을 질책했다. 팀장이 자신의 인사고과를 위해 팀 실적을 더욱 다그치기 시작한 것이다. 지 사원은 “팀장의 인사고과를 위해 퇴근 뒤에도 집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에 있는 제조업체에 다니는 전 과장(34)은 사내 소문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 그가 인사철을 앞두고 중요한 업무를 가로챈다는 소문이 돌아서다. 전 과장은 “연말이 다가오면서 업무가 많이 몰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부서장 지시에 따라 일하는 것일 뿐 공로를 가로채기 위해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고 억울해했다. “요즘은 주 52시간 제도 때문에 야근수당도 못 받고 일합니다. 그렇다고 위에서 알아주는 분위기도 아니고요. 솔직히 평소엔 남이 어떤 일을 하는지 신경도 안 쓰면서 인사철이 다가오자 예민해져 서로를 비방하는 것을 보면 씁쓸합니다.”

‘복불복’된 인사고과에 후배 눈치도 봐야

바이오 기업에 다니는 강 대리(33)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과장 승진에서 밀리게 됐다. 연초엔 꽤 괜찮은 실적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팀내 선배인 김 대리가 길을 가로막았다. 상사들도 은근히 김 대리 편을 들었다. “애 둘 딸린 가장부터 먼저 승진하는 게 낫지 않겠어? 자네는 미혼이니까 한 해만 더 참아주면 좋겠는데….”

연초에 비해 연말 실적이 상대적으로 부진했던 것도 더 이상 반항하기 힘들게 한 요인이다. 강 대리는 “방송사 연기 대상도 연초 드라마보다 연말 드라마가 유리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더욱이 강 대리는 묵묵히 일만 하는 편인 반면 선배 김 대리는 상사들에게 자기 성과에 대해 생색을 내는 데 열심이라 ‘승진하려면 앞으로는 성과를 상사들에게 대놓고 티를 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대기업 입사 10년 차인 김 차장(43)도 인사 고과철이 힘든 건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실적을 내라는 상사의 압박에 부하 직원들이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많았다. 사무실에 육두문자가 쩌렁쩌렁 울리는 건 예사였다. 그런데 지금은 분위기가 크게 달라졌다. 인사고과를 앞뒀다 해도 상사가 부하 직원을 채근하는 건 찾아보기 힘들다. 잘못 채근하면 직원들 사이에서 그 상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뒷얘기가 금방 돌았다. 그는 “일부 상사는 오히려 부하 직원에게 평소보다 더 잘해주며 인기 관리하는 모습도 보인다”며 “부하 직원을 쪼아서 승진하기보다 상향식 평가를 잘 받는 길을 택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우상 기자 id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