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민하는 국회 정무위원장 > 28일 국회에서 열린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올해 국정감사 증인채택을 놓고 여야 간 의견이 나뉘며 의원들의 발언이 이어지자 민병두 정무위원장이 생각에 잠겨 있다. /연합뉴스
< 고민하는 국회 정무위원장 > 28일 국회에서 열린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올해 국정감사 증인채택을 놓고 여야 간 의견이 나뉘며 의원들의 발언이 이어지자 민병두 정무위원장이 생각에 잠겨 있다. /연합뉴스
국내 대기업 대관(對官)팀 직원들은 최근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한 의원의 보좌관이 올해 국정감사 증인으로 신청한 기업인 명단을 외부에 흘리면서다. 명단엔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을 비롯해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김기남 삼성전자 대표 등 굵직한 그룹 총수와 최고경영자(CEO)급 기업인 67명의 이름이 빼곡히 올라 있었다. 여야 간 협의조차 안 된 ‘초안’이었다. 재계에선 국감을 앞두고 의원들이 일부러 ‘기업 길들이기’에 나선 게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더 ‘황당한’ 사례도 있다.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소속 일부 야당 의원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을 증인석에 앉히겠다고 나섰다. 지난 18~20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한 정상회담에 동행했다는 이유를 댔다. 북한에 ‘퍼주기’ 약속을 했는지 따져 묻겠다는 것이다. 기업인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이다. 한 대기업 임원은 “기업인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속셈 아니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기업인들이 ‘국감 노이로제(신경증)’에 시달리고 있다. 다음달 10일부터 29일까지 열리는 국감을 앞두고 기업인을 무더기로 불러내 호통을 치고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정치권 구태가 올해도 어김없이 되풀이될 조짐이어서다.

정무위원회는 28일 전체회의를 열어 강환구 현대중공업 사장, 윤호영 카카오뱅크 대표 등 기업인 39명을 한꺼번에 증인으로 채택하기로 의결했다. 제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증인으로 요청한 강 사장 등 일부 기업인은 신청 이유조차 공개되지 않아 ‘증인 신청 실명제’를 어긴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고 있다.

기업인들 '국감 노이로제'
국회 정무위원회뿐만이 아니다. 기업인 호출이 잦은 상임위원회로 꼽히는 국토교통위원회를 비롯해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환경노동위원회 등도 기업인 증인을 대거 신청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국회는 다음달 초 상임위별로 여야 합의를 거쳐 국정감사 증인 명단을 최종 확정한다.

◆기업인 줄소환 예고

국토위는 한진그룹 오너 일가의 ‘갑질 논란’과 ‘BMW 화재 사태’ 등을 계기로 기업인 증인 신청을 크게 늘릴 것으로 전해졌다. 사회적 이슈와 크게 상관이 없는 다른 기업인까지 이참에 부르고 보자는 식이어서 기업들의 우려가 적지 않다. 현대자동차그룹에서는 리콜(결함 시정) 문제와 관련해 정몽구 회장을 비롯 이원희 현대차 사장 등 경영진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이영호 삼성물산 사장과 박동욱 현대건설 사장, 김형 대우건설 사장 등 국내 주요 건설사 최고경영자(CEO) 10여 명도 각종 이유로 증인 신청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다.

환노위도 기업인 줄소환을 예고하고 있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 등 환노위 소속 의원들은 정몽구 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등 대기업 총수 및 공기업 대표 수십 명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노동조합 또는 비정규직 문제 등을 이유로 댄 것으로 알려졌다. 총수급 기업인까지 증인으로 부를지 여부를 놓고 여야 의원 간 이견이 커 논란이 이어질 전망이다.

여기에 기업이나 산업 분야와 연관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까지 ‘기업인 불러내기’에 가세하면서 기업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4대 그룹의 한 임원은 “정부의 요청으로 대통령을 따라갔는데, 방북했다는 이유만으로 총수급 기업인을 대거 증인으로 부르는 게 말이 되느냐. 어이가 없다”고 꼬집었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구태에 기업인들은 답답해하고 있다. 대기업 회장뿐만 아니라 경영 일선을 책임지고 있는 전문경영인들에 대한 ‘마구잡이식 증인 채택’이 또 반복되는 게 아니냐는 불만이 터져나온다. 기업인을 무더기로 불러놓고 고함을 지르는 등 ‘공개 망신’을 주는 행태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다.

한 대기업 대관담당 임원은 “지난해 처음으로 국감 증인 신청 실명제가 도입되면서 ‘묻지마 호출’ 관행이 다소 개선되는 듯 보였지만, 일단 기업인을 부르고 보자는 의원들의 인식은 크게 바뀐 게 없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기업인들 '국감 노이로제'
◆“증인 신청 기준 명확히 해야”

그동안 국감 때마다 취지와 맞지 않게 민간 기업인을 증인으로 출석시키는 사례가 끊이지 않았다. 한국경제신문이 자체 조사한 결과 국감 증인으로 선정된 기업인 수는 17대 국회(2004~2007년) 당시 연평균 52명에서 19대 국회(2012~2015년)엔 120명으로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20대 국회(2016~2017년) 들어서도 증인 신청 실명제 도입에도 불구하고 기업인 증인 수는 연평균 96명에 달했다.

기업인을 대거 증인으로 신청해놓고 무작정 기다리게 하는 관행도 문제로 꼽힌다. 대기 시간이 서너 시간에 이르지만 정작 질의 시간은 개인당 2~3분인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질문이 없어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대기만 하다 국감장을 나서는 기업인들도 있었다.

기업인들은 국감 때마다 대외 신인도 하락과 반(反)기업 정서 확산을 걱정하고 있다. 기업인들을 불러놓고 훈계하면서 망신을 주는 장면이 여과 없이 TV로 생중계되면서다. 기업 이미지에 타격을 줄 수밖에 없다는 게 기업인들의 토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몇몇 기업인은 매년 10월만 되면 해외 출장 일정을 잡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대기업 CEO는 “솔직히 국내에 남아 시달리느니 글로벌 사업장을 점검하고 사업 파트너들을 만나 미래 먹거리를 찾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경제계에선 국정 감사 관련 법과 제도를 손질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경제단체 임원은 “무분별한 기업인 증인 소환을 막기 위해선 하루 최대 감사 안건과 안건당 채택 가능한 최대 증인 수 등 기준을 명확하게 정해놔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창민/도병욱/박종필 기자 cm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