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간편식(HMR)은 ‘식사’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최근 들어선 야식과 안주 시장까지 진출해 자리를 잡았다. ‘혼술(집에서 혼자 술을 마심)’ 유행을 타고 ‘소포장’과 ‘유명식당 셰프’ 등을 내세워 점차 장악력을 높이고 있다.
요즘 트렌드는 포장마차 스타일이다. 대상 청정원은 안주 HMR 브랜드 ‘안주야(夜) 논현동 포차 스타일’을 지난달 출시했고, 오뚜기도 ‘낭만포차’라는 브랜드로 안주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두 회사가 내놓은 안주 메뉴들은 포장마차에서 시키는 것들과 똑같다는 게 특징이다. 무뼈닭발 매운껍데기 불막창 오돌뼈 닭똥집(닭근위) 등이다.
다른 점은 포장마차에서 먹을 수 있는 안주를 전자레인지와 프라이팬 조리로 간단하게 데워 먹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전략이 성공해 인기는 점차 높아지고 있다. 안주야는 출시 2년 만에 1500만 개 이상 팔렸는데, 대상 관계자는 “갈수록 판매가 더 많아지고 있다”고 했다.
편의점도 자체상표(PB) 제품을 내놓으며 HMR 야식 시장에 진출하고 있다. CU는 고등어구이와 해물볶음, 숯불연어구이 등에 이어 돼지 갈비를 통째로 넣은 ‘CU 바베큐 폭립’을 출시했다. 1인분이 담겨 있는 제품으로 일회용 위생장갑도 넣는 아이디어를 발휘했다. 미니스톱에서는 안주 시리즈 ‘미니포차’를 선보이고 사천 탕수육, 타코야끼, 깐풍왕교자 등을 내놓았다.
맛집 열풍이 불면서 유명한 식당이나 셰프와 협업한 제품도 속속 나오고 있다. 대상은 최근 중식 레스토랑인 팔선생과 함께 ‘집으로 ON 팔선생 중화볶음밥’ 3종을 출시하며 발빠르게 시장 선점에 나섰다.
야식과 안주 시장은 젊은 층에서 먼저 각광받고 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지난해 발표한 ‘2017 가공식품 세분시장 현황’에 따르면 주 3~4회 이상 간편식을 찾는 소비자 중 미혼자(35.2%)와 1인가구(37.7%) 비중이 가장 컸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관계자는 “집에서 해먹기 어려운 음식을 손쉽게 먹을 수 있어 야식과 안주류도 간편식을 찾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두 자녀를 모두 결혼시킨 김만석 씨(68) 부부는 얼마 전부터 평일 아침 식사를 밥 대신 죽으로 바꿨다. 간편식 전복죽을 전자레인지에 2~3분 데워서 간단히 먹은 뒤 집 근처 스포츠센터로 향한다. 운동 후 집으로 돌아와 곤드레비빔밥과 육개장 등 가정간편식(HMR)으로 5분 만에 차린 점심을 먹는다.HMR로 식사를 하기 전까지 부부의 아침 풍경은 이와 완전히 달랐다. 김씨의 부인은 손목과 허리가 아파 늘 병원을 다니면서도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하고, 저녁에는 장을 볼 때가 많았다. 김씨는 “국이나 탕, 찌개까지 간편식을 이용하면서 아내와 함께 운동하고 취미 생활을 할 시간이 늘어났다”고 말했다. 그는 “HMR을 좀 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HMR시장 큰손은 5060HMR이 중장년층과 실버층 가구의 식탁을 빠르게 점령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업 칸타월드패널이 올 상반기 전국 5000가구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최근 3년간 자녀와 함께 살지 않는 55세 이상 가구의 HMR 구매가 크게 늘었다.55세 이상 가구의 즉석밥, 국 또는 소스가 결합된 ‘컵반’의 3년간 성장률은 각각 118%, 190%에 달했다. 지난 6월 기준 ‘1년 안에 구매 경험이 있느냐’고 물은 결과 27.7%가 ‘그렇다’고 답했다. 노동 강도가 높은 김장을 하는 가구도 줄면서 55세 이상 가구의 포장김치 연간 구매 금액은 150억원이었다. 3년 전 60억원에서 150% 증가한 금액이다.한국인의 식탁은 밥, 국, 김치가 핵심이었다. 55세 이상 가구가 HMR 시장의 주요 소비층으로 떠오른 건 2~3년 전부터다. 초기 HMR 시장을 20~30대가 이끌었지만 HMR 시장에 국, 탕, 찌개 등 한식 제품군이 다양해지면서 중장년층이 빠르게 가세하고 있다. CJ제일제당의 비비고 육개장, 이마트의 피코크 한우곰탕, 동원F&B의 양반 버섯된장찌개 등이 대표적이다.초고령사회 영양 불균형·노인복지 해법중장년층의 HMR 소비는 편의성과 가격 경쟁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의 ‘2017 간편식 세분시장 현황’에 따르면 소비자들이 HMR을 사먹는 이유는 ‘조리하는 과정이 간편해서’라는 응답이 31.1%로 가장 높았다. ‘집에서 해먹기 어렵거나 번거로운 음식이라서’라는 응답이 13%로 뒤를 이었다.HMR은 고령사회의 먹거리 해법이 될 수 있다는 해석도 있다. 한국은 지난해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의 비율이 14%를 넘어서며 ‘고령사회’에 진입했다. 1인 가구 중 65세 이상 인구 비율도 빠르게 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5년 23.2%였던 1인 가구 중 65세 이상 인구 비중은 2025년 29.7%, 2045년 45.9%로 늘어날 것으로 추산됐다.HMR은 조리에 드는 시간과 노동력 등을 환산했을 때 직접 요리를 해먹는 것보다 비용이 적게 든다. 외식보다 가격도 싸다. 한국소비자원 조사에 따르면 냉면을 HMR로 구매할 경우 1인분에 3904원인 데 비해 외식을 하면 평균 8808원이 지출됐다. 삼계탕은 6304원으로 집에서 HMR로 즐길 수 있는 데 비해 외식을 하면 1만4231원이 들었다. 김치찌개 가격도 3580원(HMR)과 6000원(외식)으로 차이가 났다.커지는 죽·연화식 시장시니어의 HMR 소비가 늘면서 소화가 편하고 씹기 쉬운 간편식 시장도 커지고 있다. 죽, 수프, 씹기 편하게 가공된 연화식(軟化食) 등이 대표적이다. 즉석죽 시장은 지난 2년간 연평균 57%씩 성장해 올해 약 800억원대로 전망된다. 1992년 국내 최초로 ‘양반죽’을 출시해 즉석죽 시장을 연 동원F&B는 최근 광주 공장에 9917㎡(약 3000평) 규모의 죽 생산라인을 준공했다. 아워홈, 현대그린푸드는 연화식 제품을 이미 내놨고, 하림과 CJ제일제당 풀무원 매일유업 등도 이 시장에 곧 진출한다.문정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국물이 많은 한식이 냉장이 아닌 상온 보관 HMR로도 좋은 품질을 갖게 되면서 20~30대뿐만 아니라 50~60대까지 소비층이 늘고 있다”며 “집 안에서 조리하는 것에 익숙한 중장년층은 외식 대신 HMR 소비를 점점 더 늘려갈 것”이라고 말했다.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가정간편식(HMR) 시장은 인구구조 및 라이프스타일 변화와 함께 성장해왔다. 1~2인 가구 수와 여성 경제활동 증가, 고령화 등이 HMR 시장을 키우는 3대 축이다.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1인 가구 수는 지난해 11월 기준 561만9000가구로 전체 가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8.6%였다. 전체 가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다. 2인 가구를 포함하면 1~2인 가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55.7%다. 1~2인 가구 증가와 함께 여성 경제활동이 늘어나면서 집에서 식사 준비에 드는 시간이 크게 감소한 것이 HMR 시장을 키운 주요 요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영국, 미국, 태국 등 여성 경제활동 인구 비중이 높은 국가에선 HMR 시장이 크게 발달해 있다. 유럽과 일본도 HMR 시장이 전체 식품 시장의 30%를 차지할 만큼 대중화됐다. 국내에는 한식의 조리 특성과 여성이 가사를 도맡아 하던 유교 문화가 남아 있어 비교적 더디게 HMR이 발달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이야기다. 통계청 생활시간 조사에 따르면 20세 여성이 하루 평균 음식을 준비하는 시간은 2004년 35분에서 2014년 24분으로 10년간 11분 감소했다. 같은 기간 30대는 1시간39분에서 1시간24분으로 15분 감소, 40대는 1시간49분에서 1시간38분으로 11분 줄었다.1인 가구 증가도 영향이 크다. 대한상공회의소가 20대 후반부터 40대 초반까지의 전국 500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2016년 기준)에 따르면 1인 가구가 적극적으로 지출을 늘리려는 항목은 ‘여행(41.6%)’이 가장 많았다. 이어 자기계발(36%), 레저 및 여가(32.8%), 건강(32%), 취미(26%) 순이었다. 지출을 줄이고자 하는 항목은 외식(39.2%), 통신비(33.6%), 의류 및 패션(16.4%), 식품(16%) 순으로 나타났다. 여행과 자기계발, 레저와 건강 등에 돈을 쓰는 대신 외식비와 식품에 대한 지출을 줄이려는 인구가 늘면서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하고 조리가 간편한 HMR의 성장 가능성이 더 커지고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가정간편식(HMR) 시장이 급격히 커지자 골목상권도 변하고 있다. 동네 식당이나 반찬가게 등은 HMR 보편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패밀리레스토랑 등은 손님이 급감해 일부 점포를 정리하거나 아예 HMR 시장 진출을 선언하는 곳도 생겼다.한국외식업중앙회는 전국 500여 개 식당 등 외식 업체를 대상으로 음식 서비스 인력수급 실태를 조사한 결과, 지난해 대비 ‘경영 사정이 매우 나빠졌다’는 곳이 27.3%, ‘약간 나빠졌다’는 곳이 40.0%로 총 67.3%가 경영 사정 악화를 겪고 있다고 최근 발표했다. 특히 순이익이 감소했다는 답변은 80.5%에 달했다. 이에 따라 주방장을 비롯해 조리보조, 카운터, 홀서빙, 배달 등의 업무를 하는 근로자 수도 10% 안팎 줄어든 것으로 조사됐다.최저임금 인상, 내수 부진 등의 영향과 함께 식당 수요의 상당수가 HMR로 이동한 때문으로 분석된다. 먹는 수요는 정해져 있는데, HMR 수요가 급증했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데서 식비 지출을 줄였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대기업이 운영하는 외식 프랜차이즈도 다르지 않다. TGIF와 베니건스 토니로마스 아웃백스테이크하우스 마르쉐뿐 아니라 최근엔 계절밥상 올반 자연별곡 등 한식뷔페도 점포를 정리 중이다. 시장에선 소비 트렌드를 못 따라가고 있는 데다 외식 프랜차이즈 메뉴 상당수가 판매되는 HMR 품목과 비슷해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경쟁에서 뒤처진 것을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식당 폐업률은 2010년 이후 꾸준히 90%를 넘고 있다. 식당 10곳이 문을 열면 9곳은 그해 문을 닫는다는 의미다. 식당과 달리 점포가 여러 개인 대기업은 점포 정리와 함께 신사업으로 발길을 돌리는 추세다. 그게 HMR이다.CJ푸드빌은 계절밥상 매장에서 판매 중인 메뉴에 대해 배달을 시작했다. 배달의민족 요기요 우버이츠 등 배달 앱(응용프로그램)에도 들어갔다. 신세계푸드도 2016년 ‘올반’이라는 브랜드를 내놓으며 HMR 시장에 진출했다. 자연별곡을 운영 중인 이랜드파크는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HMR을 만들어 납품하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이 밖에 BBQ, 스쿨푸드, 본설렁탕, 놀부부대찌개 등 프랜차이즈와 송추가마골, 삼원가든, 하남돼지집, 금수복국 등의 주요 외식 업체들도 HMR 시장에 뛰어들었다.김재후 기자 h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