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어드십코드 도입…"경영간섭·연금관치주의" 논란 무마가 관건

오너 일가의 각종 '갑질' 물의와 밀수·탈세 의혹으로 대한항공의 기업가치가 뚝뚝 떨어지던 지난 6월 5일 국민연금은 대한항공에 공개서한을 발송했다.

당시 국민연금이 주식을 보유한 기업에 공개서한 발송이라는 주주권을 행사한 것은 처음이다.

국민연금은 대한항공 주식의 12.45%, 한진그룹 지주회사인 한진칼 주식의 11.81%를 보유한 각 회사의 2대 주주였다.

국민연금은 '국가기관의 조사 보도 관련 질의 및 면담 요청'이라는 제목의 이 공개서한에서 경영진 일가의 일탈행위 의혹에 대한 사실관계와 해결방안을 물으면서 대한항공의 입장과 그 입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자료를 요구했다.

나아가 대한항공 경영진 및 사외이사와의 비공개 면담을 요청했다.

하지만 국민연금이 지난 6월 15일 대한항공으로부터 받은 회신내용은 "경영정상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하나 마나 한 의례적 답변이었다.

2대 주주로서 푸대접을 받고 단단히 체면을 구긴 것이다.

그렇지만 국민연금으로서는 더는 어떻게 할 수 있는 행동수단이 없어 이렇다 할 후속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 신세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 국민연금은 더는 이런 수모를 겪지 않을 수 있게 됐다.

투자 기업에 대한 주주권행사 지침인 스튜어드십코드를 도입하면서, 비록 제한적으로나마 자본시장법상 '경영 참여'에 해당하는 주주권을 행사할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스튜어드십코드는 국민연금이나 자산운용사 같은 기관투자자들이 큰 집의 집안일을 맡은 집사(Steward)처럼 고객과 수탁자가 맡긴 돈을 자기 돈처럼 여기고 최선을 다해서 관리, 운용해야 한다는 지침이자 모범규범이다.

현재 미국, 영국, 일본 등 전 세계 20개국에서 다양한 형태로 시행되고 있다.

국민연금 최고의결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는 30일 스튜어드십코드 도입을 결정하면서 '경영참여'는 원칙적으로 배제하지만 기금운용위원회가 필요하다고 의결하는 경우에는 시행하기로 했다.

애초 국민연금을 관리감독하는 보건복지부가 마련한 스튜어드십코드 원안에는 없던 내용을 노동계와 시민단체 추천위원들의 강력한 요구로 막판에 집어넣은 것이다.

이날 의결된 도입방안에 따르면, 경영참여는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 등 제반 여건이 구비된 후에 방안을 마련해 시행하되, 그 전이라도 기금운용위원회가 의결한 경우에는 시행할 수 있도록 했다.

현행법은 임원의 선임·해임 또는 직무의 정지, 정관의 변경, 자본금 변경, 합병·분할·분할합병, 주식 교환·이전, 영업 양수·양도, 자산 처분, 회사 해산 등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위를 경영참여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적어도 표면적으로 국민연금은 기금운용위원회의 의결만 거치면, '일감 몰아주기' 같은 부당지원행위를 통해 총수 등 경영진 일가의 사익 편취에 일조하거나 오너 일가의 갑질 등 일탈행위로 사회적 물의를 빚고 기업가치를 떨어뜨린 회사의 임원에 대해서는 해임의결권이란 칼을 휘두를 수 있게 됐다.

'주총 거수기'니 '종이호랑이'니 하는 비아냥을 듣던 국민연금이 '행동하는 주주'로서 기업 의사결정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그간 국민연금은 막대한 지분을 가지고도 주주로서 제역할을 못했던 게 사실이다.

횡령·배임 등으로 사회적 물의를 빚은 재벌 사주의 사내이사 재선임 안건 등 민감한 사안에서는 기권하거나 중립 의사를 밝히며, 논란에 휘말리는 것을 극도로 꺼리면서 몸을 사리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앞으로 상황은 상당히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국민연금의 경영참여 주주권행사는 법적 정비작업을 거치면 더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

복지부가 "경영참여 주주권도 국민의 노후자산을 안정적으로 지키는 데 필요한 사항인 만큼, 경영참여 주주활동의 범위와 기금운용상 제약요인 등에 대해 금융위 등 관계부처와 협의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증시 큰 손' 국민연금이 지분 10% 이상을 보유한 상장 기업은 지난 19일 현재 106곳에 달한다.

1년 전 87곳보다 21.84% 늘어난 것이다.

스튜어드십코드를 시행하는 국민연금은 이들 기업에 대해 강력한 주주권를 행사할 수 있다.

국민연금의 지분율이 높은 기업은 유가증권시장에서는 대림산업(14.45%) 롯데정밀화학(13.63%), SBS(13.56%), 풍산(13.50%), 대상(13.50%), 아세아(13.50%) 등이다.

호텔신라(12.70), CJ제일제당(12.16%), 대한항공(11.50%), NAVER(10.33%), SK하이닉스(10.00%) 같은 주요 기업에 대한 지분율도 두 자릿수 대다.

국민연금이 최대 주주인 기업은 POSCO(10.82%)와 NAVER, KT(10.21%)다.

'대장주' 삼성전자(9.90%)와 현대차(8.02%)에 대한 지분율은 10%에 미치지 못했지만, 5% 이상을 보유해 주요 주주로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기금운용본부가 굴리는 국민연금기금 규모는 올해 4월말 현재 635조원이지만, 2025년에는 1천조원으로 불어날 것으로 관측된다.

하지만 재계에서는 여전히 경영 간섭을 우려해 '연금사회주의'니 '연금관치주의'니 하며 극도의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

이런 경영계 반발을 어떻게 풀어갈지가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 정착에 큰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국민연금은 이를 의식해 무엇보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인 국민연금 기금운용 의사결정 체계를 구축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이해 상충의 우려가 있는 정부 인사를 배제하고 가입자대표 등이 추천한 민간 전문가 14명 이내로 현행 의결권전문위원회를 확대 개편한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를 설치, 운영하기로 했다.

수탁자책임전문위는 중요 의결권 찬반 결정, 주주권 행사 원칙·범위 검토, 기금운용본부 수행 주요 주주활동(공개활동) 승인 및 점검 등 국민연금 주주권 행사의 전권을 쥐게 된다.
'경영참여' 국민연금, '갑질 총수'에 임원해임 카드 꺼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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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