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명이 함께 한국에 들어와 반도체 장비업체들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있습니다.”

최근 중국으로부터 지분 매각 제안을 받은 반도체 장비업체 D사 대표는 중국 측 관계자에게 이 같은 말을 들었다. 중국 기업 및 정부 관계자 8명이 팀을 이뤄 입국한 뒤 인수 대상으로 삼을 만한 한국 장비업체를 탐색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들은 주로 증권사 보고서 등을 통해 1차 정보를 얻은 뒤 해당 업체 관계자들을 다각도로 접촉하며 인수 가능성을 타진한다고 한다. 한국 업체를 호시탐탐 노리는 중국이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사냥감’을 물색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 반도체 생태계' 통째 사려는 중국… 인력 이어 장비업체 '사냥'
◆협력사 노리는 중국

시작은 ‘기술자’였다. 중국 반도체 기업들은 과거 헤드헌팅 업체를 통해 “1년 연봉의 세 배를 5년 동안 보장한다”는 식의 제안을 하며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임원급 기술자들을 빼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술 격차가 빠르게 벌어지는 반도체산업 특성상 몇 명의 기술자를 데려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 공정을 파악하는 일은 힘들었다. 중국 측이 반도체 공정별로 한국 기술자 100여 명씩을 한꺼번에 데려가려고 시도한 이유다.

‘인력 빼가기’를 통해 반도체 양산 기술을 확보하지 못한 중국 기업들은 한국의 반도체 소재·장비 기업들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한국 장비업체에 대한 인수합병(M&A) 제안은 한국이 오랜 기간 쌓아 올린 ‘생태계’를 통째로 가져가겠다는 전략이라는 설명이다.

반도체 장비 사업은 제조 기술력이 높다고 완성되지 않는다. 어떤 화학물질, 가스와 반응시키느냐에 따라 양산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에 업계 관계자들은 장비산업을 ‘종합 예술’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중국 업체로선 장비 회사를 인수하면 특정 공정에 필요한 화학 물질의 종류와 배합비 등 ‘최적의 레시피’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장비회사에 소속된 장비 기술자들을 통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의 공정 기술을 유추하는 일도 가능하다는 게 업계의 판단이다.

이 종합 예술을 완성하는 과정은 그만큼 어렵다. 1984년 삼성반도체 기흥 공장이 설립된 뒤 30년이 넘도록 반도체 장비 국산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지난해 기준 국산화 비율이 20%에 불과한 배경이다.

초창기에는 모든 장비를 해외 업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공장을 증설할 때마다 중소 협력사들이 미국, 일본산 장비와 똑같은 제품을 생산하면서 생태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업체들도 외국 장비업체에 의존했던 선행 기술 연구 프로젝트를 하나씩 국내 업체에 맡기기 시작하면서 일부 영역에서 독자적인 기술력을 갖춘 업체들이 생겨났다.

◆“중국 자본 M&A 막을 방법 없어”

아직까지 중국이 한국에서 사들일 만한 반도체 장비업체가 많지 않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반도체 호황이 이어지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발 ‘낙수효과’가 나타나고 있어서다. 하지만 업황이 꺾여 설비 투자가 줄어들면 상황이 달라진다. 압도적인 자본을 앞세운 중국의 한국 ‘장비업체 쇼핑’이 본격화될 가능성이 크다.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회장은 “중국 정부의 목표는 반도체 생산뿐만 아니라 소재 설비 국산화율도 70% 수준으로 끌어올려 수출할 수 있을 정도로 기술력을 갖추는 것”이라며 “장비 국산화에는 큰 관심을 쏟지 못했던 한국과 대조적”이라고 설명했다.

중국 자본의 M&A를 막을 방법이 없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국가 R&D 예산이 투입되지 않았다면 국가 핵심기술로 지정됐다고 하더라도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장비 회사에 대한 M&A를 산업통상자원부에 신고할 의무가 없다. R&D 예산이 투입됐더라도 신고 의무만 있을 뿐 승인 절차는 강제 사항이 아니다.

정부 관계자는 “중국이 한국의 반도체 장비업체를 통째로 사들이면 그동안 쌓은 장비 기술은 물론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의 노하우까지 함께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