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안정 -5800원.’ 서울 강동구 A아파트 한 가구의 지난달 관리비 내역서에 담긴 일부 항목이다. 정부의 일자리안정자금을 지원받아 이 가구의 관리비가 5800원 줄었다는 내용이다.

정부가 최저임금 대폭 인상에 따른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지원하고 있는 일자리안정자금으로 상당수 아파트에서 경비원 임금을 올려주는 게 아니라 입주민의 관리비 부담을 줄이는 데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저임금발(發) 고용대란을 우려해 부랴부랴 정책을 내놓다 보니 지원 요건을 정교하게 설계하지 못해 국민 세금이 특정 아파트 입주민들의 주머니로 들어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경비원 월급 올려주라고 줬더니… 아파트 관리비로 줄줄 샌 '일자리자금'
용처 제한 없는 ‘눈먼 돈’

일자리안정자금은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영세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의 인건비 부담을 완화하고 근로자의 고용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올해부터 시행된 사업이다. 30인 미만 사업장을 대상으로 월 보수액 190만원 미만 근로자 1인당 월 최대 13만원을 지급한다. 월 수령액이 190만원을 넘더라도 비과세 연장근로수당 등 초과급여가 기본급의 20%(약 40만원) 이내인 경우에도 지급한다. 아파트는 청소·경비 등 근로자가 30명을 넘어도 지원 대상이다.

문제는 지원금이 반드시 인건비 인상이나 경비원 복리후생에 쓰이도록 사용처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유일한 조건은 ‘임금이 전년보다 줄어들지만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상당수 입주자대표회의는 근로시간을 줄이고 경비원의 월급을 올려주지 않거나 소폭 인상하면서 일자리안정자금을 지원받아 관리비를 절감하는 데 쓰고 있다. 천안 백석지구 B아파트의 한 입주민은 “일자리안정자금 항목으로 매달 몇천 원씩 관리비가 절감되는데 우리 아파트 환경미화원과 경비원들의 임금은 전혀 오르지 않았다고 한다”며 “정책 취지는 이게 아닐 텐데 좋아해야 할지 헷갈린다”고 했다.

근로시간 줄면서 월급은 제자리

경비원 월급 올려주라고 줬더니… 아파트 관리비로 줄줄 샌 '일자리자금'
올해 최저임금이 작년보다 16.4%나 올랐음에도 아파트 경비원들의 임금이 작년과 비슷한 이유는 명목 근로시간이 줄었기 때문이다. 서울 강서구의 C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는 올해 초 경비원들의 휴식시간을 점심·저녁 각각 30분, 야간 1시간씩 늘렸다. 그 결과 경비원 월급은 작년에 비해 3만~5만원 오르는 데 그쳤고, 이 아파트는 ‘임금이 줄어들지만 않으면 된다’는 근거에 따라 일자리안정자금 지원을 받고 있다. 물론 경비원들도 동의했다. 이 아파트 한 경비원은 “최저임금이 오른 만큼 월급도 오르면 좋겠지만 그렇게 요구했다간 자칫 일자리가 없어질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정부가 지원 대상으로 설정해놓은 ‘월 보수액 190만원’ 기준이 오히려 경비원들의 임금 인상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연장근로수당을 제외하고 월 190만원 상한을 넘기지 않기 위해 근로시간을 변경하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일자리안정자금 신청 이후 월 급여가 190만원 이상으로 오르면 사업주가 지급 능력이 있다고 판단해 지원을 중단한다.

靑 게시판에도 “제도 다듬어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이 같은 내용이 여러 건 올라와 있다. 한 청원자는 “경비원들은 종전에 비해 전혀 급여가 오르지 않았으며, 근무시간을 줄였다지만 ‘강제 휴식시간’에도 근무지를 지켜야 한다”며 “정부가 주장하는 대로 저소득층 소득이 늘기는커녕 아파트 주민들이 지원금을 나눠 먹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경비원들이 아파트 입주민보다는 여러모로 어려운 분들인데 (지원금을) 주민이 나눠 먹고, 또 관리회사는 주민 부담을 덜어줬다고 공지하며 자랑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허술한 정책을 바로잡을 해법을 제시한 청원도 있다. 현직 아파트 관리소장이라고 밝힌 한 청원자는 “최고 13만원 한도를 정해놓고 임금 인상분만큼만 지원한다면 사업주(입주자대표회의)가 근로자의 근로시간 조정으로 얻는 이득이 없으므로 근로자가 혜택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 경비원 임금 인상이 이뤄진 아파트에만 지원해야 한다는 얘기다.

3조원 가까운 혈세를 풀어놓고도 정부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일자리안정자금 주무부처인 고용부 관계자는 “일자리안정자금이 반드시 인건비에 쓰여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며 “다만 정부 지원을 받기 위해 허위로 근무시간을 줄이는 것은 명백한 근로기준법 위반이므로 실태 파악 및 근로감독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정부는 내년에도 올해와 비슷한 규모의 일자리안정자금을 편성할 계획이다.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