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는 시대 흐름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해 왔다. 그래서 모든 차들은 출시 당시에 유행한 디자인과 기술력을 판가름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한편으로는 최근 연결성, 자율주행, 전기화 등의 첨단 기술이 강조되면서 옛 것에 대한 가치가 흐려지기도 한다. 이를 되짚어보기 위해 40년간 자동차 산업을 지켜본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 전영선 소장이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클래식카 12대를 소개한다. 그 다섯 번째는 로터스 에스프리, AMC 이글이다.<편집자주>

-1978년형 로터스 에스프리
영국의 명품 스포츠카 제조사인 '로터스(Lotus)' 는 자동차 경량화의 화신으로, 매끈한 쐐기형 디자인에 화끈한 성능을 갖춘 튜닝카의 제왕으로 꼽힌다. 브랜드 이름은 그리스 신화 속의 식물 이름으로, 그 열매를 먹으면 세상의 고통을 잊어버린다는 환상적 의미를 갖고 있다.

로터스를 만든 앤소니 콜린 브루스 채프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동차 개조기술 분야에서 천재로 꼽힌다. 채프먼은 아무 것도 헛되게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대학 시절 영국판 포드 모델T인 오스틴 세븐을 바탕으로 시제차 마크1을 만드는 재능과 야심을 보였다. 1951년에는 가벼운 마크3를 만들어 레이스에 도전하면서 가볍고 간편한 차 만들기를 지향했다. 1950~60년대에는 로터스 세븐과 한국 기아자동차에서도 조립 생산한 바 있는 엘란에 양산차의 엔진 부품을 사용, 영국적인 경 스포츠카로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1957년에는 자동차 역사상 처음으로 플라스틱을 사용한 모노코크 차체를 내놓았다.

레이서 출신인 채프먼은 모터스포츠에도 관심이 많아 1960년 첫 미드십 엔진 타입의 포뮬러 엔진을 선보였다. 이후 마크16, 마크 25, 마크 49, 마크 72, 로터스 포드 등의 그랑프리 레이싱카를 개발해 70년대 말까지 F1머신 중에서 가장 많이 챔피언(7회)에 오른 화려한 전력을 자랑했다.

로터스가 1975년에 내놓은 에스프리는 FRP 차체에 엔진을 운전석 뒤에 얹고 뒷바퀴를 굴리는 미드십 레이아웃 스포츠카다. 외관은 한국산 고유모델 1호인 '포니'를 디자인했던 이탈리아의 조르제토 쥬지아로가 빚어냈다. 날카로운 직선이 조화를 이룬 꾸밈없는 영국 신사의 멋을 그대로 옮긴 스타일로 평가 받았다. 쥬지아로는 처음 이 차의 이름을 '키위(Kiwi)'로 지으려 했으나 'E'로 시작하는 로터스 차명의 전통에 따라 Esprit(재치, 재기)로 바꿨다고 한다.

1977년 개봉한 영화 007 시리즈 '나를 사랑한 스파이(The Spy Who Loved Me)'에서는 본드카로 등장해 인기를 높였다. 007 시리즈 제 10탄인 이 영화는 해저에 있는 아틀란티스 요새를 중심으로 첩보전이 펼쳐진다. 이때 제임스 본드(로저 무어 분)가 에스프리를 개조한 수륙 양용 잠수차를 타고 활약한다.로터스 에스프리는 50대만 한정 생산해 그 주가를 한껏 높였다.

에스프리는 4기통 2.2ℓ 최고출력 213마력 엔진을 탑재해 최고속도 238㎞/h를 자랑했다. 1982년엔 V8 터보 엔진을 얹은 최고 235마력의 고성능 제품을 선보였다. 이 차는 최고시속 245㎞, 0→시속 100㎞ 가속 5.6초의 성능을 갖췄다. 로터스는 에스프리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빠른 4기통 경량 스포츠카를 만드는 회사로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섰으며 에스프리는 로터스의 기함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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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형 AMC 이글
1980년 이전까지 미국의 빅4는 GM, 포드, 크라이슬러, 아메리칸모터스코퍼레이션(AMC) 체제였다. 빅4의 막내였던 AMC는 현재 사라졌지만, 1970년대 석유파동의 후유증과 경영침체에서 재기하기 위한 그 마지막 구원의 모델은 세계 최초의 풀타임 4WD 승용차로 가장 성공한 차였다. 1980년, 사양길에서 고군분투 하던 AMC는 세계 최초로 짚의 4WD 시스템을 적용한 크로스오버 제품인 '이글(Eagle)'을 출시했다. 이글은 1988년 회사가 사라질 때까지 마지막 큰 숨을 쉬게 해준 막내 효자였다.

1979년 8월, 이글이 공개될 당시 미국에서 판매되는 4WD차는 픽업트럭과 이를 기반으로 만든 밴 그리고 짚과 파트타임 4WD을 적용한 승용차로 나눠져 있었다. 이글은 안락한 4WD 승용차이면서 기존의 4WD의 틈새를 메우는 역할을 했다. 당시 자동차 전문가나 매체들도 이글을 승차감과 핸들링, 그리고 4WD차의 험로 주파력을 하나로 합친 크로스오버 세단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했다.

이글은 구동계 기술뿐만 아니라 큰 것을 좋아하는 미국인 전통을 깨트렸다. 전문가들은 이글을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차체로 평했다. 왜건형의 경우 전형적인 세단에 노치백 스타일을 접목하면서 리무진 못지않은 고급스러운 실내 디자인과 프랑스의 아르 데코(Art deco) 스타일을 갖췄다. 또한, 1950~60년대 미국 자동차에 유행했던 차체 양옆 우드그레인과 거부감 없는 해치백 스타일의 왜건은 못 갈데없는. 못할 것이 없는 그야말로 80년대 미국산 승용차의 맥가이버였다.

이글은 혁신적인 차라는 점에서, 또 기존의 불편한 4WD차의 대안 모델로써 대중의 관심을 충분히 끌었다. 민간용뿐만 아니라 빙판길 주행시험용차와 응급구조차, 경찰차로 수요가 확대됐다. 미국에서도 특히 고산 지대인 록키산맥 지역과 눈이 많이 오는 북부지역 주민들이 다목적 패밀리카로 활용했다. 성공을 거둔 이글은 한 때 구매 대기 기간이 6개월이나 걸렸다.

이글은 1980년부터 1988년 AMC가 크라이슬러에 흡수될 때까지 24만3,000대가 판매돼 회사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혹심했던 1970년대 세계적 석유파동 후유증으로 몰아닥친 불경기 속에서, 특히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미국 자동차가 이 정도 실적을 올린 것은 당시 미국 자동차산업의 기적이라 평가했을 정도로 AMC의 이글은 회사나 미국을 보아서도 개천에서 난 용이었다.

AMC와 이글은 자동차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졌지만, 승차감 좋은 세단을 전 지형 주파용 크로스 오버카로 만들어 냈다는 AMC의 선견지명이 후세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기획]시대별 가장 아름다운 차 Top 12-&#10116;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