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기념한 일간지 기사를 언급하며 노동계뿐 아니라 기업들도 시대적 흐름에 맞춰 변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간부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지난달 초 경총이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개최한 ‘주요 기업 임원회의’에 참석한 대기업 노사담당 임원은 송영중 경총 상근부회장의 발언을 듣고 당황했다. 경총 주요 간부들과 국내 주요 기업 노사담당 임원들이 노사 현안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난데없이 ‘카를 마르크스’가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이 회의에 참석한 다른 관계자는 “최근 노사담당 임원들은 근로시간 단축, 최저임금 인상 등 노동 현안에 대응하느라 밤잠을 설치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경총 간부가 노조 위원장들이나 할 법한 얘기를 하니 뒷얘기가 나오는 것”이라고 전했다.
기업 옥죄는 현안 쏟아져도… 내분 일으키고 제 살길만 찾는 경제단체
무기력한 경제단체

경제단체들이 기업에 과도한 부담을 지우는 정부 정책에 대해 기업들의 이해관계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 경제단체들이 정부 눈치를 보면서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당장 산업 현장에선 올 7월부터 시행될 주 52시간 근무제로 인한 혼란이 확산되고 있지만 이에 대해 제도 보완 등을 촉구하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노동정책에 대한 재계 목소리를 대변해 온 경총은 송 부회장과 임직원 간 ‘불화설’까지 불거지며 “직원들이 업무에서 손을 놓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최저임금 산입범위 개편 문제를 국회 대신 최저임금위원회에서 논의하자는 양대 노총 제안을 지난달 21일 경총이 전격 받아들인 사건이 계기가 됐다. 이날 이후 임직원과 거리가 멀어진 송 부회장은 지난 한 주 동안 회사로 출근하지 않고 자택에서 전화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업무 지시를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경제계 관계자는 “송 부회장에 대한 손경식 경총 회장의 신뢰가 점점 낮아지고 있는 것이 내부 갈등의 핵심”이라고 귀띔했다. 대한상공회의소,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무역협회 등 다른 경제단체들은 이런 상황을 ‘강 건너 불구경’하는 분위기다.

공동 대응·소통도 없어

경제단체들이 현안에 공동 대응하거나 상호 협력하는 모습도 싹 사라졌다. 대한상의, 전경련, 무역협회가 과거 적절하게 협업과 분업을 해왔던 노동, 규제, 통상외교나 대통령 경제인 사절단 지원 등 현안에 대해 경제단체들의 목소리가 모이지 않고 있다. 경제단체 고위관계자는 “기업 현안에 대해 경제단체들이 과거처럼 공동 대응하자는 의견을 냈더니 대한상의가 빠지겠다고 하더라”며 “그 이후 경제단체 간 논의가 자취를 감췄다”고 전했다.

경제단체의 발표 수위도 제각각이다. 지난달 25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최저임금법 개정안을 통과시켰을 때가 대표적이다. 법 개정 내용은 최저임금 범위에 매달 받는 상여금과 현금성 숙식비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이날 경제단체들의 대응은 “최저임금의 기본 취지가 지켜진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박재근 대한상의 기업환경조사본부장)부터 “법 개정 혜택이 거의 없다”(최승재 소상공인연합회 회장)까지 다양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과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이 노·사·정 대화기구를 공동 탈퇴하는 등 힘을 합쳐 강력하게 반발한 것과 대조적이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이후 전경련이 해체 위기를 맞는 것을 목격한 경제단체들이 정부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꺼리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신 일자리 창출이나 남북한 경제협력 사업 등 정권 입맛에 맞는 현안만 다룬다는 것이다.

경제단체 고위직에 관료 출신들이 낙하산으로 선임되는 것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송 부회장이 지난 4월 경총 부회장에 선임되면서 경제 5단체 상근부회장은 모두 관료 출신으로 채워졌다. 경제단체 관계자는 “경제단체 부회장이나 회장 인사철이 되면 전·현직 관료들이 정치권에 줄을 대는 등 부작용이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좌동욱/도병욱 기자 leftk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