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 구매팀장과 SK이노베이션 전기자동차 배터리 영업팀장이 약 4시간 동안 저녁을 먹었다. 두 사람은 이 자리에서 배터리 납품 방식에 대해 잠정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둘 중 한 사람은 4시간 근무를 했고, 다른 한 사람은 개인적인 시간을 보낸 것으로 기록됐다. 두 회사가 근로시간을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오는 7월1일부터 300인 이상 사업장에 근로시간 단축제도(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된다. 제도 시행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지만 기업들의 혼란은 여전하다. 어디까지를 근무시간으로 봐야 할지에 대해 누구도 똑 부러진 결론을 내려주지 않고 있어서다. 지침을 마련해야 할 고용노동부가 ‘침묵’하고 있는 가운데 기업들은 갈팡질팡하고 있다.
거래처와 식사? 해외출장은?… 근무시간 산정 놓고 기업 '갈팡질팡'
기업들 “헷갈리네”

업무시간 중 흡연이나 거래처 직원과의 업무상 저녁식사, 해외출장 중 이동시간 등은 근무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또 임원과 임원 운전기사는 근로시간 단축 대상일까. 한국경제신문이 31일 주요 대기업 14곳에 근로시간 단축과 관련해 가장 논란이 많이 되고 있는 현안에 대한 내부 방침을 문의한 결과 삼성전자, 포스코, 현대중공업, 네이버 등 4곳이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고용부의 가이드라인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답변을 한 10개 기업 해석도 제각각이었다. 근무시간 범위 기준부터 달랐다. 10개 기업 중 4곳은 거래처와의 저녁식사 시간을 근무로 볼 수 없다고 했다. 한 기업 인사담당자는 “식사시간까지 포함하면 근무시간이 지나치게 늘어나 일단 제외하기로 결론을 냈다”고 말했다. 반면 5개 기업은 ‘업무 연관성이 있거나 상사가 지시한 자리’라면 근무시간에 포함하겠다고 답했다.

고용부는 업무 수행 일환이라고 판단되면 근무시간에 포함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김영완 한국경영자총협회 노동정책본부장은 “앞으로 분쟁이 많이 생길 수 있는 문제”라며 “거래처와의 주말 골프, 부서장이 소집한 주말 야유회, 회사가 마련한 공식적인 단체회식 등을 어떻게 봐야 할지도 논란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장거리 출장 판단도 엇갈렸다. 3개 기업은 비행시간이나 공항 대기시간 등도 근무시간에 포함하겠다고 했다. 반면 5곳은 “정규근무시간 외 이동시간은 추가근무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재량근로제도를 활용해 실제 이동시간과 상관없이 하루 8시간 근무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재량근로제를 활용하려면 노사합의가 필요하다. 노조가 반대하면 이동시간도 근무시간에 포함해야 한다는 게 대다수 전문가 견해다. 주말에 장거리 해외출장을 다녀오면 주중 1~2일을 쉬어야 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줄소송 이어질 우려도

흔히 ‘관리자’로 여겨지는 임원이 근로시간 단축 대상인지도 논란거리다. 조사에 응한 10개 기업 모두 “임원은 대상이 아니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고용부의 판단은 다르다. 고용부는 “임원이라도 매일 출근해 사용자의 지휘·감독 아래 일정한 근로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보수를 받으면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는다”고 해석했다. 임원이라도 업무 방식이나 권한 등에 따라 근로시간 단축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정부와 기업의 인식 차가 크다 보니 향후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가 나온다.

그렇다면 임원과 출·퇴근 시간이 비슷한 임원 운전기사는 어떨까. 기업들의 답변은 제각각이었다. A기업은 “임원 운전기사는 종업원 300인 미만의 외부 회사 소속이기 때문에 근로시간 단축과는 무관하다”고 답했다. B기업은 “임원 운전기사는 근로시간 단축의 예외를 인정받는 감시단속적 근로자(간헐적으로 근무해 휴식시간이나 대기시간이 많은 근로자)로 봐야 한다”고 했다. 4개 기업은 운전기사의 근무 방식을 지금처럼 유지하겠다고 했고, 3개 기업은 대리기사를 활용해 운전기사 근무시간을 줄이겠다고 했다. 고용부 관계자는 “감시단속적 근로자로 인정받으려면 대기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어야 한다”며 “운전기사라고 무조건 감시단속적 근로를 한다고는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출근한 뒤 커피를 한 잔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시간도 모호하다. 원칙적으로는 근무시간에서 제외된다. 하지만 10개 기업 중 8개 기업은 “(근무시간에 포함할지를) 직원 재량에 맡기겠다”고 답했다.

김 본부장은 “획일적으로 근무시간을 줄이려다 보니 기업들이 큰 혼란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황효정 고용부 근로기준혁신추진팀장은 “어디까지를 근무시간으로 봐야 할지는 근로시간 단축과 상관없이 이전에도 있었던 문제”라며 “정부가 일괄적으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현안별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도병욱/안재광/이승우/박상익 기자 do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