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제조업의 요람인 산업단지가 비어가고 있다. 경쟁력을 잃은 공장들이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3일 경기 안산시 신원로에 공장 매물 및 임대 현수막이 걸려 있다. 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한국 제조업의 요람인 산업단지가 비어가고 있다. 경쟁력을 잃은 공장들이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3일 경기 안산시 신원로에 공장 매물 및 임대 현수막이 걸려 있다. 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경기 안산시 반월공단에서 38년째 업소용 주방가전을 생산하고 있는 A사는 오랜 기간 준비한 공장 이전 계획을 접어야 할 위기에 놓였다. 근무 여건 개선 등을 위해 국내 공장을 최신 시화멀티테크노밸리(시화MTV) 단지로 확장 이전하려 했지만 회사 사정이 급격히 어려워진 탓이다. 한때 정부가 꼽은 ‘수출 강소기업’에 선정될 만큼 유망하던 A사는 제조원가 상승으로 지난해 말 채권단 자율협약에 들어갔다. 부푼 꿈을 안고 분양받은 1만6541㎡의 공장 부지는 허허벌판으로 남게 됐다.

제조업의 요람인 산업단지 곳곳이 잠자고 있다. 3일 한국산업단지공단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 국가산업단지 가운데 부지를 분양받았지만 첫 삽조차 뜨지 못한 곳이 약 67만㎡에 달한다. 판교테크노밸리 전체와 맞먹는 규모다. 제조업 경기가 악화되면서 입주하려던 기업들이 속속 계획을 접은 탓이다. 입주한 기업 가운데서도 수출 급감으로 가동률이 뚝 떨어져 임차료조차 감당하기 버거운 곳이 상당수다.

경기를 이끌던 수출이 둔화하면서 전통 주력산업이 급속히 위축되고 있지만 남북한 관계 급진전에 따른 해빙 무드에 묻혀 경고음이 들리지 않고 있다. 이른바 ‘지정학적 리스크’ 해소로 경제주체들의 심리가 조금 나아지고 있을 뿐 생산, 투자, 소비, 고용 등 실물 지표는 줄줄이 후퇴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 분석이다.

강소기업도 '털썩'… 産團이 멈춰선다
제조업 평균 가동률이 70% 선으로 떨어졌지만 중소기업이 몰려있는 산업단지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국내 최대 중소제조업체 밀집지역인 남동·반월·시화산업단지는 60%대 초반까지 하락했다. 구미산업단지도 사정은 비슷하다. 수출 주문이 끊겨 공장의 40% 정도가 멈춰있는 상황이다.

한 중소업체 사장은 “국가적 관심이 온통 남북 관계에 쏠린 사이 산업 현장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며 “정부는 수출과 생산 투자 동반 감소가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하지만 현장 분위기는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고 말했다.

충남 당진 석문국가산업단지는 총 23개 업체가 착공을 미루고 있다. 이 중 13곳의 중소기업이 경영상 이유 등으로 부지를 처분하려 나섰지만 사겠다는 곳이 없어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다. 업체들은 “공장 부지를 팔고 싶어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 발만 동동 구르는 답답한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석문산단은 2008년 평택·당진항 항로 준설 과정에서 발생한 준설토로 매립해 지은 산단이다. 당시 정부는 준설토로 산단을 조성해 458억원의 세금을 절감했다며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기업들은 산단 떠나고

10년이 지난 현재 석문산단 분양률은 23% 수준에 불과하다. 정부는 뒤늦게 관련 법을 개정해 이달부터 석문산단을 ‘지원우대지역’으로 변경했다. 입주 기업에 지원하는 정부보조금을 ‘토지매입가의 9% 이내’에서 ‘40% 이내’로 대폭 확대하는 게 골자다. 설비투자 지원금도 업체가 투자한 금액의 ‘11% 이내’에서 ‘24% 이내’로 두 배 이상으로 늘렸다. 일각에서는 기존 기업들이 입주해 있는 국가 산단의 가동률조차 매년 하락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놓기는커녕 뒤늦게 세금으로 ‘호객행위’에 나선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로또 분양’으로 불렸던 일부 산단 땅을 입주하기도 전에 ‘울며 겨자먹기’로 처분하는 기업도 등장하고 있다. 공장 건설 후 5년이 지나 부지를 매각하면 수년치 영업이익을 웃도는 시세 차익을 누릴 수 있지만 당장 버텨낼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가동률은 60%대로 급락

한국 경제를 떠받치는 중소기업이 활기를 잃으며 산단 가동률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전국 산업단지 통계포털인 이클러스터넷에 따르면 전자업체가 몰려 있는 구미산업단지는 2016년 2월 74.2%에서 올 2월 65.7%로 8%포인트 이상 가동률이 급락했다. 전국 최대 중소 제조업체 밀집지역인 남동·반월·시화산업단지도 같은 기간 2~5%포인트씩 하락했다. 남동은 63.9%에서 61.6%로, 반월은 67.4%에서 62.0%로 떨어지며 60% 선도 위태롭다.

기계와 전자업체가 많은 구미는 대기업 생산시설의 해외이전 여파로 타격을 받고 있다는 계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주력 업종인 전기전자 업체는 69.3%로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기계 업체는 51.9%로 공장 절반이 가동을 멈춘 상태다.

기업 규모별 양극화도 심해졌다. 시화산업단지는 300인 이상 기업의 올해 2월 가동률이 78.9%로 80%에 육박했다. 반면 50인 이상~300인 미만 기업은 74.5%, 50인 미만 기업의 가동률은 66.7%에 그쳤다. 구미에선 이 같은 현상이 더욱 두드러졌다. 300인 이상 기업(73.3%)과 50인 미만 소기업(37.0%)의 가동률 격차가 36%포인트 이상 벌어졌다. 김경만 중소기업중앙회 경제정책본부장은 “전반적인 제조업 경기 위축과 조선 자동차 등 주력산업 부진이 가동률 하락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특히 대기업이 주력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함에 따라 이들에 부품을 납품하는 중소기업 가동률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올 들어 최저임금의 가파른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 등의 여파로 기업 경영환경이 더욱 어려워져 이들이 가동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기업환경은 갈수록 악화

공장을 새로 짓고 싶지만 부족한 산단 인프라 때문에 가로막힌 기업도 상당하다. 여수산단에 공장 증설을 계획했던 산업가스업체 C사는 최근 분양받은 부지를 결국 포기하기로 했다. 업체 측은 “분양 당시 생각한 것과 달리 산단 조성 이후 대형 물류차량이 지나갈 진입로가 확보되지 않아 공장 증설이 무산됐다”고 털어놨다.

경제계 관계자는 “수많은 예산이 투입되는 국가 산업단지 조성 사업이 지역 민원 해결 차원에서 접근하거나 수요 예측을 잘못해 수급불균형 문제가 있었다”며 “지금부터라도 4차 산업혁명과 같은 경제 패러다임에 맞는 단지로 조성해 산업경쟁력 강화와 지역 균형발전에 기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재원 기자/김낙훈 중소기업전문기자 wonderfu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