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사실상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 절차에 들어갔다. 우리 정부가 국민연금에 압력을 넣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하도록 함으로써 삼성물산 투자자이던 자신들이 손해를 봤다는 이유에서다. 경제계에선 “1·2심 법원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승인을 ‘성공한 로비’의 결과물로 판단하고, 정부 역시 과거에 내린 판단을 적폐라며 스스로 뒤집어 투기자본에 공격의 빌미를 제공한 셈”이라며 “충분히 예견된 일이 일어난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엘리엇 “삼성 합병으로 손해”

엘리엇이 법무부에 제출한 것은 ‘중재의향서’다.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 소송을 내기 전 법무부에 먼저 중재할 의향이 있느냐고 물어본 것이다. 법무부는 “관련 내용을 검토 중”이라고 했지만, 중재에 응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게 법조계의 분석이다. 한 로펌 변호사는 “중재는 사실상 우리 정부가 알아서 손해를 배상하라는 것과 같다”며 “정부가 다퉈보지도 않고 꼬리를 내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정부는 앞서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 등과도 중재 없이 소송에 들어갔다.
[단독] "삼성물산 합병 찬성은 적폐"라는 정부 판단이 엘리엇 강공 자초
엘리엇이 ISD 절차에 들어간 것은 2015년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개입해 결과적으로 삼성물산 주식을 보유한 자신들이 손해를 봤다는 이유에서다. 두 회사는 당시 관련 사업을 합쳐 시너지를 내고, 바이오 등 신사업을 확대하기 위해 합병하기로 했다. 합병 방식은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흡수합병하되, 삼성물산 약 세 주를 제일모직 한 주로 교환하는 방식이었다. 엘리엇 측은 중재의향서에서 “당시 주가는 제일모직이 삼성물산보다 높았지만 총자산은 삼성물산이 더 큰 상황에서 합병 비율이 제일모직에 유리했다”는 주장을 편 것으로 알려졌다.

엘리엇은 2015년 당시에도 합병에 반대하며 법원에 삼성물산 주주총회 결의 금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법원은 그러나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기각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이후 투자위원회를 열고 12명 중 찬성 8명으로 합병에 찬성했다.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는 출석 주주의 69.53%, 발행주식 총수의 58.91% 찬성으로 합병안이 통과됐다.

◆“찬성 결정은 적폐” 판단이 빌미

상황이 바뀐 것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면서다. 2017년 초 국정조사특별위원회는 조사 결과 보고서에서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함으로써 국민연금에 막대한 손해를 초래했다는 평가도 있다’고 적었다.

법원도 엘리엇에 유리한 판을 깔아줬다. 법원은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국민연금에 대한 지도·감독권 남용(직권남용죄) 혐의로 1심과 2심에서 나란히 징역 2년6개월을 선고했다.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에게는 국민연금에 약 1387억원의 손해를 초래(업무상 배임죄)했다며 마찬가지로 1심과 2심에서 징역 2년6개월을 내렸다.

여기에 복지부 적폐청산위원회가 4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대한 국민연금의 찬성 결정을 ‘청산해야 할 적폐’로 규정한 것이 엘리엇의 강공에 힘을 실어줬다는 게 법조계 분석이다. 적폐청산위는 향후 재판 결과에 따라 관련자에 대한 적절한 조치까지 요구했다. 경제계 관계자는 “정부 스스로 적폐로 생각하는 마당에 외국계 투기자본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그것이 더 이상한 것”이라고 말했다.

◆자가당착에 빠진 정부

결국 정부의 섣부른 판단이 화를 자초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한 연기금의 운용부서장은 “합병 이후 대규모 손실이 발생했다든가 결합에 심각한 차질이 발생했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적폐로 규정한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으로 국민연금과 엘리엇 등 투자자들이 손해를 봤다는 것도 아직은 판단하기 이르다는 지적이 많다. 금융권 관계자는 “합병이 진행된 2015년 5~6월은 코스피지수가 크게 하락했던 시기인 만큼 삼성물산의 합병 후 주가 하락이 불공정한 합병 때문이라고 단정하기도 힘들고, 손해액을 추산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엘리엇이 ISD를 공식 제기할 경우 정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 관계자는 “엘리엇의 편을 들 수도, 안 들 수도 없는 자가당착에 빠졌다”고 말했다.

● ISD

투자자-국가 간 소송제(investor-state dispute). 외국인 투자자가 현지 정부의 불합리한 정책과 차별대우, 협정·계약 위반 등으로 손해를 봤을 때 현지 정부를 제3 중재 기구인 국제 중재기관에 제소할 수 있는 제도.

김일규/고경봉 기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