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라 기자의 알쓸커잡] 커피 한 잔에 담긴 옛 공장의 꿈
멈춰 버린 공장에서 카페로. 한참을 유행하던 카페 트렌드입니다. 도시 재생을 표방한다며 건축 내장재를 다 드러내고, 일부러 벽을 못생기게 허물어 대충 페인트칠한 어두컴컴한 인테리어. 하지만 잠깐만 그 공간에 있어 보면 느낌이 오죠. 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얼마 전 제주에 내려가 오랜 친구를 만났습니다. 제주시 한림에 자리 잡은 그 친구는 ‘앤트러사이트’로 오라고 하더군요. 서울에서도 이미 같은 이름으로 유명한 카페라 자신 있게 “OK”라고 답했습니다. 얼마 후. 분명 내비게이션은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는데, 왜 카페 비슷한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지. 같은 자리를 몇 번이나 맴돌고서야 겨우 찾았습니다. 돌로 벽을 쌓고 나무로 지붕을 만든 거대한 창고 모양의 그 카페를. 보고도 믿기지 않아 여러 번 두리번대다 작은 문을 찾아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습니다.

카페 안에 들어서면 두 가지에 놀랍니다. 흙바닥 위에 자라나고 있는 녹색 식물들 때문에, 그리고 그 사이에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기계들 때문에. 이 자리는 원래 오래된 전분공장이었다고 합니다. 한때 바쁘게 감자와 고구마를 부수고, 갈고, 말리곤 하던 장소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소박한 돌담을 쌓아 만든 커피바가 있고, 바리스타들이 여유롭게 커피를 내립니다. ‘나쓰메 소세키’ ‘공기와 꿈’ ‘윌리엄 블레이크’ ‘버터 펫 트리오’ 등 직접 로스팅해 이름 붙인 원두를 고르는 재미도 쏠쏠하지요. 커피 한 잔을 들고 공장 이곳저곳을 탐험하다 보면 어느새 다른 생각은 사라집니다. 녹슬고 제 수명을 다한 기계가 예전엔 뭣하던 용도였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정돈되는 느낌이 들더군요.

앤트러사이트는 ‘무연탄’이라는 뜻입니다.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무연탄처럼 커피로 에너지를 만들어 보겠다는 창업자의 각오가 담긴 이름이라고 합니다. 앤트러사이트 1호점인 서울 합정동점도 역시 1970~1980년대 신발공장을 재활용해 탄생시킨 공간입니다. 서교점과 한남점은 분위기가 조금 다르지만 제주점에서만큼은 창업자 뜻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한참을 멈춰 있던 공간이 다시 살아난 것처럼, 커피 한 잔으로 정신이 번쩍 드는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폐공장을 재활용해 카페가 된 곳은 전국 곳곳에 많아졌습니다. 45년간 가동했던 부산의 고려제강 철강공장은 지금 카페 테라로사가 됐습니다. 서울 선유도의 ‘엘 카페 로스터스’, 경기 용인 기흥의 ‘나인 블럭’ 역시 공장 모습을 간직한 카페로 남았죠. 전남 담양군의 대나무 돗자리를 생산하던 공장은 ‘노매럴’ 카페로, 곡식 저장창고는 ‘담빛 예술창고’로 변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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