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열 마리오아울렛 회장이 서울 가산동 마리오아울렛 3관 앞에서 굴뚝 모양의 조형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홍성열 마리오아울렛 회장이 서울 가산동 마리오아울렛 3관 앞에서 굴뚝 모양의 조형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1990년대 말. 구로공단의 시계는 멈춰 섰다. 한국 수출의 10%를 담당했던 공단. 공돌이, 공순이라 불리던 11만 명의 근로자들이 산업화의 문을 열었던 그곳. 정보화시대가 오자 공장은 지방으로 밀려갔다. 외환위기는 남아 있던 공장의 엔진마저 세워버렸다. 공단의 상징인 ‘수출의 다리’는 광명시와 서울을 잇는 다리 역할만 했다. 공단은 황폐해지고, 주변은 우범지대가 됐다.

공단의 성장과 쇠락을 지켜본 한 기업인은 결심했다. “내 젊은 시절을 품고 있는 공단을 이렇게 망가지게 놔둘 수 없다. 시대의 흐름에 맞게 바꿔보자.” 공단의 역사를 시작한 의류산업에서 단초를 찾았다. 그리고 패션아울렛을 짓겠다고 나섰다. 사람들은 미쳤다고 했다. 하지만 그 결심이 구로공단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한국에 아울렛을 처음 연 홍성열 마리오아울렛 회장을 만났다.

구시대적 사고와 싸우다

마리오아울렛이 문을 연 것과 구로공단이 디지털단지로 바뀐 것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궁금했다.

홍 회장은 말했다. “외환위기 이후 동네는 폐허 같았죠. 밤에는 열 명도 안 다녔어요. 그게 지금은 패션타운이 된 거죠. 마리오아울렛이 들어선 이후 지역 이미지가 바뀐 게 시작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지역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어요. 이후 벤처기업이 하나둘씩 터를 잡았습니다. G밸리로 불리는 오늘날 모습이 만들어진 출발점이 마리오아울렛이었다고 자부합니다.”

홍 회장은 벤처기업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마리오아울렛 인근에 있는 마리오타워 건물 일부를 벤처기업협회가 쓸 수 있게 했다. 지역 최고경영자(CEO)들이 식사할 수 있는 ‘폼나는’ 식당을 열어보기도 했다.

마리오가 자리 잡는 과정은 험난했다고 했다. “막상 땅을 사고 지으려 했더니 대출해주는 은행이 반대했습니다. 돈 떼일까 봐 걱정이 많았던 것 같아요. 10층을 짓겠다고 했더니 6층만 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어요. 지하주차장도 못 파게 했죠.” 은행뿐만이 아니었다. 공단을 관리하는 산업단지공단은 더 했다. “수출단지에 제조업이 와야지 유통업은 안 된다”고 막아섰다. 허가를 내주려 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홍 회장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죠. 공단도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하는데 유통업이 못 들어온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래서 아울렛 건물에 제조시설을 넣는 방식으로 시작했습니다. (공장은) 다 망해 나가는데 오래된 규정에 얽매인 구시대적 사고와 싸우는 과정이 제일 힘들었어요”라고 회고했다.

좋은 상품은 화장실 옆에 있어도 팔린다

부지를 매입한 1999년 당시 국내에는 아울렛이란 개념이 없었다. 성공할 확신이 있었는지 물었다.

홍 회장은 “확신은 무슨 확신. 그 방향이 맞다고 생각하면 그 길로 가는 게 기업인이죠”라고 했다. 잠시 후 “물론 생각은 있었죠. 선진국처럼 국내에서도 아울렛이 일반화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고 덧붙였다. 30년간 까르뜨니트 브랜드로 패션사업을 한 감각이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옷을 소비하는 패턴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좋은 브랜드의 옷을 가치 있게 소비하는 방식, 그게 아울렛이라는 확신은 있었어요.”

여전히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그래도 구로지역은 수요가 너무 적지 않았을까. 답은 간명했다. “수십 년간 패션사업을 하면서 깨달은 게 있어요. 좋은 상품은 백화점 화장실 옆에 진열해도 잘 팔린다는 거예요. 장소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는 1980년대 까르뜨니트가 잘 팔릴 때 얘기를 해줬다. “백화점에서 까르뜨니트는 한 번도 좋은 자리에 들어간 적이 없었어요. 그래도 어떻게 알고 왔는지 국내 소비자는 물론 일본 바이어까지 찾아오더라고요. 소비자들은 아무리 멀어도 가치를 위해 찾아옵니다.”

왜 도심형 아울렛이었는지도 물었다. 미국, 유럽에서는 교외형 아울렛이 일반적이다. 그는 “상상해보면 알 수 있지 않나요”라며 설명했다. “미국과 유럽 사람들은 덩치도 크고 체력도 좋습니다. 우리와 달라요. 한국 사람들은 교외형 아울렛에 가면 건물 하나만 돌아도 지쳐서 식당에 가서 쉴 수밖에 없어요. 힘들면 물건을 사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죠.”

구로에 대한 기억들

홍성열 회장은 마리오아울렛 건물 벽면에 구로공단 조성 초기에 들어와 사업한 기업과 기업인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홍성열 회장은 마리오아울렛 건물 벽면에 구로공단 조성 초기에 들어와 사업한 기업과 기업인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진양화성 1969년, 국도화학공업 이삼열 회장 1972년, 삼신봉직 강신주 회장 1973년, 삼성물산 1969년, 효성물산 1968년, 삼리염직 1969년, 국제보세 1969년.’

마리오아울렛 3관 벽면에 하얀 글씨로 새겨져 있는 기업과 기업인의 이름이다. 국내 1호 수출공단인 구로공단이 조성된 초기에 이 지역에 자리 잡은 기업들이다. “당진 촌놈이 1970년 서울에 올라와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어요. 그게 구로공단이었고, 지금 2관 자리가 내 첫 직장입니다. 그런 역사를 기록하고 싶었지요. 구로공단 하면 비웃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업과 기업인들이 없었으면 한국의 산업화는 없었을 거예요. 물론 마리오아울렛도 없었겠죠.”

마리오아울렛은 홍 회장에게 단순한 돈벌이가 아니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곳이고 기념관이자, 미래를 여는 공간이기도 하다. 패션에서 답을 찾은 것도 같은 이유다. “내가 패션으로 시작했고, 구로공단도 처음 시작할 때 섬유산업이 중심이었습니다. 그 역사를 유지하면서 시대의 흐름에 맞게 바꾸는 것, 그게 하고 싶었던 일입니다.” 미싱이 멈춘 공단을 패션타운으로 만든 것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래서 마리오아울렛 외관 벽돌은 동네 공장을 철거할 때 수거한 파벽돌을 썼다. 3관 앞과 옥상에는 공단의 상징인 대형 굴뚝을 조형물로 설치했다. 고향집을 버리고 서울로 올라와 산업화의 주인공이 된 이름 없는 공돌이와 공순이에게 성공한 공돌이가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기업인의 감각, 그리고 좌절

그렇게 2001년 문을 열었다. 성공적이었다. 홍 회장은 “한 달쯤 지났을까. 건물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사람들이 몰려와 진짜 걱정도 했습니다. 순간 다음은 무엇일까 생각해봤더니 분명하더라고요”라고 말했다. 그는 곧장 2관, 3관 부지를 찾아 나섰다. “대기업이 들어올 거라고 예상했어요. 그들과 경쟁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아울렛을 더 키워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일반인과 다른 기업인 특유의 감각이었다. 그 결과 2004년 2관, 2012년 3관이 차례로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였다. 옆에 W몰이 들어섰다. 이어 현대아울렛, 롯데아울렛이 길 건너에 자리 잡았다. LF도 둥지를 틀었다. 그렇게 구로공단 수출의 다리 근처는 패션타운이 됐다. 경쟁의 결과는 마리오아울렛의 완승이다. 지금도 상권 중심은 마리오다. 전철역 이름도 가산디지털단지역(옛 가리봉역)과 마리오아울렛역을 병기해 쓴다.

그가 왜 마리오아울렛을 다른 지역에 내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인생을 살면서 남 탓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근데 기업인이 사업을 못하게 하는 규제에 대해서는 지금도 막 화가 날 정도예요.” 규제 때문이라고 했다. “3관까지 짓는 데 10여 년 걸렸어요. 공단 규제 때문이었는데 한 5년은 아무 일도 하기 싫더라고요. 잃어버린 시간이었죠”라며 잠시 말을 멈췄다. 이어 “기업인은 된다고 하면 사막이라도 달려가는 사람들인데 그걸 못하게 한 거예요”라고 했다. 마리오아울렛이 자리 잡는 과정에서 규제에 발목이 잡혀 공격적인 사업 확장을 할 수 없었다는 얘기였다. 한마디를 덧붙였다. “기업인에게도 때라는 게 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지금은 지방으로 뛰어다니며 마리오아울렛을 확산하기엔 지쳤다는 표정으로.

패션인이 패션인의 마음을 안다

그가 생각하는 마리오의 성공 비결은 뭘까. “나는 지금도 유통업자가 아니라 패션인입니다. 백화점에 들어가 온갖 갑질을 당해봐서 패션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요. 그래서 수수료는 낮춰주고, 인테리어도 하지 말라고 했어요. 백화점처럼 인테리어할 거면 아울렛에 뭐하러 오냐고. 요즘 말로 하면 상생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제대로 된 브랜드가 아니면 못 들어오게 한 것도 효과가 있었어요. 우리 슬로건이 ‘유명 브랜드, 합리적 가격 마리오란 말이오’ 아닙니까.” 검증된 브랜드만 입점시켜 소비자, 브랜드, 아울렛이 모두 성장하는 구조를 갖췄다는 얘기였다.

마리오 3관은 재단장 중이다. 콘셉트가 뭐냐고 물었다. “동네가 바뀌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옷 사러 왔지만 주변지역에 청년들이 많아졌어요. 그러나 문화생활을 할 공간은 없어요. 그래서 라이프스타일 숍으로 3관을 바꾸고 있습니다.” 패션은 기본이고, 식당 볼링장 서점(영풍문고) 노브랜드 미용실까지 모두 있어 생활과 레저를 한번에 해결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을 지향한다고 했다.

1층에는 유니클로가 들어올 예정이다. 이에 대해 홍 회장은 “예전에는 유니클로를 못 들어오게 했어요. 다른 국내 브랜드가 타격을 받을 것 같았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메이드 인 코리아’ 하면 세계에서도 알아주고, 디자이너의 수준도 높아졌어요. 이제는 경쟁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고 생각해 입점시키기로 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그는 “인근에 있는 공장을 활용해 역사관도 짓고, 디자이너가 훈련받을 수 있는 학교도 세우고 싶습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큰 땅을 찾고 있다. 홍 회장은 마리오아울렛을 구로지역의 역사, 사람, 직업, 생활, 미래의 거점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듯했다.

■ 홍성열 회장은

△1954년 충남 당진 출생 △1980년 마리오 상사 설립 △1984년 여성니트 브랜드 까르뜨니트 출시 △1998년 대한패션디자이너협회 이사 △2001년 마리오아울렛 개장 △2004년 마리오아울렛 2관 개장 △2010년 구로기업인협회 회장 △2012년 마리오아울렛 3관 개장 △2015년 서강대 명예 경제학박사 연천 허브빌리지 인수

김용준/안재광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