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이대훈 농협은행장(58)은 타고난 강골이다. 180㎝가 훌쩍 넘는 키에 체격도 탄탄하다. 경기·서울 지역본부장 때 매일 새벽 관할 지점들을 돌아본 뒤 출근해도 아픈 적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난달 20일 저녁 서울 서대문역 근처 서해안칼국수에서 만난 이 행장은 감기에 걸려 목이 잠겨 있었다. 그는 “지난해 말 행장이 된 뒤 전국 방방곡곡 지역본부를 찾다 보니 십수 년 만에 감기에 걸렸습니다. 현장의 좋은 의견을 들었다는 훈장 같은 감기 아니겠습니까”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행장 취임 후 한 달 동안 9개 영업본부를 방문해 5000여 명의 직원을 만났다. 이 기간 그의 이동 거리는 3000㎞가 넘는다. “모든 직원에게 각각 세 가지 질문을 하며 애로점을 들었습니다. 소외되는 직원이 있어선 안 돼요. 영업 본부 방문이 끝나니 ‘패션(passion·열정)왕’이라는 별명을 직원들이 붙여주더군요.”

부모님 몰래 농협대 지원

그는 칼국수 국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나즈막한 목소리로 칼국수와의 인연을 소개했다. “어릴 때부터 칼국수를 좋아했습니다. 집안이 넉넉하진 못했어요. 농민의 아들이었지만 쌀은 언제나 귀했습니다. 보급받은 밀가루를 어머니가 밀대로 밀어 손칼국수를 해주실 때면 5남매가 모여들곤 했어요. 그때 추억 때문인지 칼국수는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습니다. 2013년 프로젝트금융부장을 맡으면서 본사로 출근한 뒤부터는 시원한 바지락 육수에 반해 직원들과 이 집을 자주 찾곤 합니다.”

이 행장은 조선 성종의 다섯째 아들인 회산군의 후손이다. 400여 년 전 경기 포천에 크게 터를 잡았던 왕족들의 논과 밭은 세월이 흐르면서 작아져만 갔다. 이 행장은 “증조할아버지 때 이후로 가세가 기울었다”며 “부모님은 1남4녀 가운데 유일한 아들이었던 제가 농사를 짓기를 바랐다”고 했다.

[한경과 맛있는 만남] 이대훈 농협은행장 "행장 취임 후 본점 인사만 3박4일… 직원들 일 잘하도록 판 깔아줄 것"
성적이 우수했던 이 행장은 대학에 가고 싶었다.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이 농협대 입학을 권했습니다. 학비가 없다는 게 최대 장점이었어요. 졸업하면 취직자리도 보장됐고요. 부모님 몰래 원서를 썼는데 합격했습니다. 부모님을 겨우 설득해 농협과 인연을 맺은 것이 벌써 39년째입니다.”

농협대 생활은 이 행장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 계기가 됐다. “200명이 합숙하면서 새벽 5시 반이면 일어나 구보를 했죠. 그때 다져진 건강이 지금까지 온 것 같습니다. 농협대는 직원 양성기관을 넘어 농업인을 잘살게 하기 위한 ‘협동조합 운동가’를 양성하는 사관학교였어요. 무감독으로 시험을 봤고 자존심도 대단했죠. 조합원의 삶을 낫게 한다는 협동조합 정신에 완전히 매료됐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뒤 포천농협에 들어갔다. 금융업무는 물론 경제사업까지 일은 넘쳐났다. “조합원을 대신해 가축을 팔 때는 온몸이 분뇨 범벅이 되곤 했죠. 학교에서 배운 조합운동을 한다는 보람에 비료 포대를 나르고 밤 12시에 퇴근하기 일쑤였지만 지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관리자급으로 입사했기 때문에 5년 넘게 터울이 있는 고등학교 선배들보다 직급이 높았지만, 격의없이 어울리며 자리를 잡았다. “군에 입대하던 날도 오전에 출근하고 제대 날도 오후엔 사무실로 향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집보다 회사가 편했던 것 같습니다.”

현장에 답이 있다

이 행장은 1985년 농협중앙회 근무를 지원했다. 더 큰 조직에서 폭넓은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제가 아무 연고가 없는 평택으로 발령이 나자 어머니는 사표를 내라고 하시더군요. 밥도 못하는 제가 못 미더웠던 거죠. 굶어죽을 거란 말씀이셨죠. 대신 결혼하면 갈 수 있다고 하셨죠. 그래서 평소 말은 못하고 속으로만 좋아했던 동료 여직원에게 청혼했어요. 청혼하고 나서 3주 만에 결혼식 올리고 평택으로 떠났죠. 아내가 저를 구제해주면서 겨우 직장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한경과 맛있는 만남] 이대훈 농협은행장 "행장 취임 후 본점 인사만 3박4일… 직원들 일 잘하도록 판 깔아줄 것"
농협중앙회로 옮긴 뒤에도 좀 따분했다고 했다. “중앙회 근무는 시중은행과 비슷했어요. 현장보다는 사무실에 있는 게 대다수였습니다. 좀이 쑤셨죠. 1994년 농협 안성교육원에 교수로 가기 전까진 은행원으로의 소임을 다했습니다.”

교육원 교수 시절 이 행장의 현장 중시 철학은 빛을 발했다. 그는 조합원에게 선진 농업기술과 우수 영농 사례를 가르치는 업무를 맡았다. 이 행장은 교육 과정이 겉돈다고 느꼈다. 이론에 치중한 커리큘럼이 문제였다. 조합원들은 책 속 내용만 보고 기술이나 영농 사례를 이해하기 어려워 했다.

후식으로 과일이 나오자 이 행장은 갑자기 주먹을 꺼내 보였다. “제가 주먹만 한 딸기를 키우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농사를 잘 짓는 농가가 있으면 전국 어디든 찾아갔어요. 답은 현장에 있습니다. 자연농법을 배우기 위해 경주에 내려가 비닐하우스 옆 창고에서 한 달간 합숙하며 닭똥만 치우기도 했어요. 그 정성을 높이 산 농장 주인이 노하우를 알려줬죠.”

이 행장은 교육원 옆에 실습농장을 조성했다. 다들 불가능하다고 포기했던 사업이었다. 2만3140㎡(약 7000평) 규모 농장엔 전국 각지에 우수 영농 사례를 보고 체험할 시설이 들어섰다. 돼지 200마리와 닭 2000마리를 자연농법으로 키우는 축사도 세웠다. 이 행장은 “실습장에서 10만 명이 참여한 박람회를 두 번이나 열었습니다. 영농 기술을 전파하려고 TV 방송에도 출연하곤 했죠.”

은행장이 된 칼국수 지점장

이 행장은 2004년 경기도청 지점장으로 발령을 받자마자 영업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저의 영업 비결은 바로 칼국수”라고 귀띔했다. 그는 영업을 위해선 차별화와 관계 형성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지금은 트레이드 마크가 된 파마머리를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영업은 고객을 자주 보며 좋은 관계를 형성해야 제대로 할 수 있죠. 3만원짜리 밥을 한 번 먹는 것보다 6000원짜리 칼국수 식사 자리를 다섯 번 하는 것이 고객의 마음을 얻는 비결입니다. 회사에서 영업을 위한 지원이 적어 고객들에게 칼국수만 대접하곤 했죠. 처음에는 고객에게 면박을 받기도 했지만 자주 만나고 진심으로 대하니 모두가 인정해줬습니다. 1년이 지나니 경기도청 공무원 대다수가 저를 알고 ‘칼국수 지점장’이라고 불렀죠.”

이 행장은 지역영업본부장을 연달아 맡아 실적이 만년 꼴찌였던 경기, 서울을 전국 수위권으로 올려놨다. 이 대표는 말보다 발을 앞세운 것을 성공 비결로 꼽았다. “아침 출근을 매번 다른 영업점으로 해 직원들과 마음을 터놓고 얘기했어요. 지점마다 영업을 잘하는 직원을 만나 비결을 묻고 다른 지점에 전파했습니다. 100~200명의 직원을 모아 맥주파티를 하니 실적은 자연스레 따라왔습니다.”

이 행장은 직원들이 일할 수 있는 분위기와 토대를 깔아주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고 했다. “취임 직후 본점 직원들과 취임 인사를 마치는 데 3박4일이 걸렸습니다. 모든 직원과 5분 정도는 얘기했어요. 직원들이 신나게 일할 수 있는 판을 깔아주고 과감하게 애로사항을 들어줄 것입니다. 그러면 올해 목표인 순이익 7800억원은 무난히 달성할 것이라고 봅니다.”

그는 ‘농협맨’으로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농협은행은 농협이라는 큰집에 속해 있는 게 강점입니다. 은행들의 금리 차이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상품으로 차별화되긴 어렵죠. 농협은행에 돈을 맡기면 농업인에게 이익으로 돌아간다는 가치를 알리는 데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농업인들에 특화된 금융 지원…"농가소득 5000만원 시대 선도"

농협은행이라는 이름은 2012년 3월부터 정식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농협중앙회가 이때 신용부문과 경제부문을 분리했다. 신용부문은 농협금융지주 아래 농협은행, 농협생명, 농협손보 등의 체제로 갖춰졌다.

하지만 농협은행은 57년 역사를 지니고 있다. 1961년 8월 탄생한 농협중앙회의 핵심이 농협은행이다. 2012년 3월 이전까지는 농협 신용부문이라고 불렸지만 사실상 ‘농협=농협은행’으로 인식됐다.

농협은행은 농업인에게 특화된 금융서비스와 금융지원을 제공함으로써 도·농 상생에 힘쓰고 있다. 2013년 8월 미국 뉴욕사무소를 열며 해외 진출에 시동을 걸었다. 지난해 6521억원의 순이익을 올렸다. 시중은행 가운데 가장 많은 점포망(1151개)을 보유하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예수금은 202조원, 대출은 214조원이다.

지난해 12월 4대 농협은행장에 취임한 이대훈 행장은 올해 목표를 ‘농가소득 5000만원 시대 선도’로 잡았다.
[한경과 맛있는 만남] 이대훈 농협은행장 "행장 취임 후 본점 인사만 3박4일… 직원들 일 잘하도록 판 깔아줄 것"
이대훈 행장의 단골집 서해안칼국수

바지락 육수에 파 송송…서해바다가 입안에 가득


서울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근처 직장인들이 자주 찾는 칼국수 전문점이다. 2번 출구에서 나와 영천시장 쪽으로 100m 정도 올라가면 있다. 8년전 적십자병원 근처에 자리를 잡았으나 돈의문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5년 전 현재 위치로 자리를 옮겼다.

[한경과 맛있는 만남] 이대훈 농협은행장 "행장 취임 후 본점 인사만 3박4일… 직원들 일 잘하도록 판 깔아줄 것"
이 집의 메뉴는 딱 세 가지. 칼국수(7000원), 파전(1만2000원), 그리고 보쌈(2만6000~3만6000원)이 전부다. 세 가지 모두 푸짐한 양과 정갈한 맛을 자랑한다. 이 집의 메뉴를 모두 즐기려면 적어도 네 명은 가야 한다. 칼국수는 서해안에서 많이 나는 바지락으로 국물을 낸다. 노리끼리한 바지락 육수에 쫄깃한 면, 그리고 송송 썰어넣은 파와 호박이 들어간다. 2인분을 시키면 대야 수준의 그릇에 바다 맛이 느껴지는 칼국수가 한가득 담겨 나온다. 바지락은 한 사람당 20개 정도 넉넉히 먹을 수 있을 정도로 푸짐하다. 커다란 철판에 담겨 나오는 파전 역시 둘이 먹기엔 제법 부담이 되는 양이다. 저녁 회식 안주로는 보쌈이 인기가 높다. 생굴이 들어간 보쌈김치와 보쌈과 함께 나오는 배추 맛이 일품이라는 평가다.

김순신 기자 soonsin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