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전선 '불량죽음' 네자(字)의 기적
2016년 11월. 최진용 대한전선 사장이 황급히 싱가포르로 날아갔다. 싱가포르 최초의 400㎸ 전력망 구축 프로젝트에 다른 기업들이 물망에 올랐다는 얘기를 듣고서였다. 발주처인 싱가포르 전력회사 SP파워에셋 고위 임원을 만난 최 사장은 “대한전선에도 기회를 달라”고 매달렸다. 북미 지역 최초의 500㎸ 전력망 구축 프로젝트와 관련한 동영상도 직접 보여줬다. 그의 자신감 있는 모습에 SP파워에셋 관계자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결국 수주에 성공했다. 총 계약 금액은 919억원. 대한전선이 5년간 수주한 프로젝트 중 최대 규모였다. 대한전선 서류 양식에 적혀 있는 ‘두려움 없이 실행하라. 즉시, 반드시, 될 때까지’라는 행동 강령을 몸소 실천한 순간이었다.

◆“불량 죽음, 품질 생존”

대한전선이 해외에서 대규모 수주를 이어가며 ‘소리 없는 질주’를 하고 있다. 지난 1월에는 미국 애리조나주와 뉴멕시코주를 500㎸급 송전망으로 연결하는 선지아 프로젝트 중에서 가장 높은 기술력을 요하는 지중선 전체구간 수주에 성공했다. 2014년 156억원이던 영업이익은 281억원(2015년), 487억원(2016년)으로 꾸준히 성장해 지난해 547억원을 기록했다.
대한전선 '불량죽음' 네자(字)의 기적
1955년 설립된 대한전선은 국내 최초의 종합 전선 제조업체다. 2000년대 초반부터 전선 사업이 정체된 뒤 돈을 벌기 위해 본업과 상관없는 부동산 투자에 나섰다. 이탈리아 최대 전선업체인 프리즈미안 지분도 인수했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이들 자산의 가치가 폭락하면서 부채가 불어났다. 채권단 관리아래 ‘고난의 행군’을 이어가던 대한전선은 결국 2015년 사모펀드(PEF) 운용사인 IMM PE에 인수됐다.

IMM PE는 2015년 3월 최 사장을 구원투수로 등판시켰다. 1977년 대한전선에 입사해 1990년까지 근무했고, 일진전기에서 최장수 CEO를 지낸 전문경영인이었다. 그는 63년 전통의 대한전선이 보유한 기술력을 믿었다.

먼저 시장에서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필요했다. ‘불량 죽음, 품질 생존’이라는 문구부터 작업복에 새겼다. 취임 이후 납품한 물건 중 고객에게서 불량 판정을 받은 제품이 단 한 건도 없을 정도로 품질을 끌어올렸다. 이미 납품한 제품에 대해서는 현장 점검을 나가 품질을 지속적으로 확인했다. 떠났던 중동의 대형 고객사도 다시 대한전선과 거래하기 시작했다.

해저케이블, HVDC(고압직류송전) 등 고난이도 기술을 위한 연구개발(R&D)도 확대했다. 지난해 400㎸ 이상급 초고압케이블 매출을 전년 대비 5배 이상 늘리는 등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군에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대한전선 '불량죽음' 네자(字)의 기적
◆인센티브로 원가 절감

‘적자 수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원가 경쟁력을 확보해야 했다. 최 사장은 오랜 노하우를 바탕으로 ‘영업 견적 시스템’을 구축했다. 원가를 절감하는 데 기여한 임직원에게는 인센티브를 제공했다.

수천만원의 인센티브를 받는 사례가 생기자 직원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2015년 이전까지만 해도 직원들은 ‘패배주의’에 빠져 있었다.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최 사장은 “회사가 아직 어려운데 인센티브를 주면 어떡하느냐며 말리는 이들도 있었다”며 “하지만 회사를 위해 몇십억원씩 벌어오는 직원들에게 이 정도 보상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인센티브 제도는 또다시 원가 경쟁력 확보로 이어졌다. 최 사장이 추구하는 ‘보람 경영’이 실적으로 이어진 것이다.

공격적인 영업도 계속됐다. 중동시장에 집중해온 대한전선은 유가 하락으로 인한 변동성이 커지자 신흥시장인 동남아시아와 유럽, 미국으로 시장 다각화를 추진했다. 지난해 4월에는 영국 런던에, 9월에는 미국 뉴저지에 지사를 설립했다.

IMM PE에 인수된 이후 기업 체질 개선에 성공한 대한전선은 한 단계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최 사장은 “2020년 이후 대규모 투자를 통해 대한전선은 새롭게 도약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