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계 주요 인사는 지난 5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집행유예 판결을 내린 정형식 부장판사에 대해 “절묘한 ‘신의 한 수’를 뒀다”는 등의 호평을 하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 만연해 있는 반기업 정서와 기업인 관련 판결에 엄격해진 법원 내부 분위기 등에 굴하지 않고 오직 법리에 근거한 판결을 내리면서도, 재계에 정경유착 근절에 대한 경종을 동시에 울렸다는 것이다.

당초 법조계와 경제계에서는 이 부회장의 항소심 결과가 1심 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했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이 부회장에게 씌워진 뇌물죄 혐의 등을 판결에 관철시키기 위해 총력전을 펼쳐온 데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1심 판결도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2심 재판부가 기존 판결의 골격을 크게 흔들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얘기였다. 문재인 정부를 떠받치고 있는 ‘촛불 주도층’의 압박도 재판부에 큰 부담을 줄 것으로 예상됐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판결 직전까지만 해도 재판부가 정부와 촛불 여론의 눈치를 볼 것으로 생각했다”며 “마음에 안 드는 판결이 나오면 해당 판사와 가족까지 ‘신상털기’에 나서는 요즘 세태도 이 부회장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본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 부장판사는 이런 예상을 깨고 1심과 다른 법리를 적용해 이 부회장의 주요 혐의에 대부분 무죄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특히 ‘이 부회장 무죄=박 전 대통령 무죄’라는 등식을 깨면서 법리에 근거한 판결을 내릴 수 있었다는 것이 경제계의 평가다. 현행 형사법 체계에서 뇌물을 준 사람보다 받은 사람의 책임이 더 무겁다는 이날 판결 논리가 대표적이다.

정 부장판사는 “요구형 뇌물사건은 공무원의 요구가 강요나 직권남용을 동반할 경우 공여자보다 (수수자인) 공무원에 대한 비난이 상대적으로 가중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의 뇌물죄 혐의가 무겁다고 해서 이 부회장까지 엄하게 처벌해야 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정 부장판사는 그러면서도 재계에 정경유착 근절에 대한 ‘엄중한 경고’를 잊지 않았다. 그는 “모든 정황을 고려하더라도 공무원의 비위에 연루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 경영진에 부여된 책임”이라고 일갈했다. 4대 그룹의 한 고위임원은 “앞으로 작은 연결고리라도 있다고 판단된다면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의미의 경고를 내렸다고 생각한다”며 “무척 깐깐한 스타일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