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가 올해부터 시내 2만3000여 개 봉제공장을 명품 장인공방처럼 육성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봉제공장이 밀집해 있는 서울 중랑구 망우동의 한 공장에서 직원들이 원단 가장자리의 올이 풀리지 않도록 박음질하는 ‘오버로크’ 작업을 하고 있다.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서울시가 올해부터 시내 2만3000여 개 봉제공장을 명품 장인공방처럼 육성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봉제공장이 밀집해 있는 서울 중랑구 망우동의 한 공장에서 직원들이 원단 가장자리의 올이 풀리지 않도록 박음질하는 ‘오버로크’ 작업을 하고 있다.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서울의 역동성을 보면 새로운 명품이 나올 것 같은 냄새가 난다.”

수지 멘키스 인터내셔널 보그 편집장이 서울에 왔을 때 한 말이다. 그는 서울의 에너지와 열정, 창의성을 봤다. 그가 보지 못한 또 다른 서울의 자산이 있다. 2만3000개에 달하는 봉제공장이다. 원단부터 의류, 가방, 신발을 모두 제작할 수 있다. 다른 도시보다 빠른 속도로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인프라다. 산업화 시대 주역이었던 섬유산업의 유산이기도 하다. 봉제 인력의 평균 연령은 48세. 나이 든 만큼 세계적 수준의 손재주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창의성, 열정, 봉제공들의 손기술, 섬유산업 인프라는 따로 놀았다. 하도급업체 수준이었다.

서울시는 이를 하나로 묶어 내기로 했다. 서울을 미국 뉴욕, 이탈리아 밀라노와 같은 명품 패션을 상징하는 도시로 만드는 ‘메이드 인 서울’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된 배경이다.
서울 2만여개 봉제공장 '장인 공방'으로… 패션 스타트업과도 연결
◆봉제공에서 장인으로

가장 먼저 추진할 프로젝트는 봉제공을 장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탈리아 명품은 수많은 장인의 손을 거쳐 나온다. 서울의 봉제공들도 이들 못지않은 손기술을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울시 관계자는 “해외에서는 봉제 전문가를 ‘소잉 마스터’라고 부르며 대우해준다”며 “작업 환경과 인식을 개선해 선진국처럼 봉제 인력이 장인으로 대접받는 문화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봉제업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기로 했다. 패션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과 아이디어가 풍부한 디자이너와 이들을 최대한 빨리 연결해주기 위한 프로젝트다. 스타트업과 디자이너가 글로벌 브랜드가 되면 이를 제조한 봉제공들이 이탈리아 공방의 장인과 같은 대접을 받게 하는 게 목표다.

패션 스타트업 창업과 수출은 매년 늘고 있지만 봉제업은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다. 봉제공을 과거 미싱사와 비슷한 수준으로 보는 사회적 인식을 바꾸겠다는 것이 서울시의 생각이다. 이를 통해 미래의 장인을 꿈꾸는 손재주 있는 젊은이들을 패션산업으로 유입시킬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봉제업체는 서울을 도심·서북·동북·남부권으로 나눠 각 지역 패션지원센터에서 관리한다. 창신동과 망우동에선 패션지원센터를 운영 중이고, 지난달 구로 현대아울렛에도 지원센터를 열었다. 서북권에도 센터를 열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운영은 서울 디자인재단이 맡는다.

◆‘패션 혁신도시’ 꿈꿔

서울시는 중장기적으로 연구개발부터 디자인, 유통 마케팅까지 패션산업 전반에 변화를 꾀할 계획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가장 부가가치가 높은 연구개발, 디자인, 브랜딩에서는 해외 기업들이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며 “모든 분야에서 서울시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현재 미국 듀퐁, 일본 도레이 등 상위 3개 기업이 세계 섬유 원자재 시장의 7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유럽은 세계 고급 패션제품 시장의 74%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을 따라잡기 위해 5년 이상 꾸준히 투자하는 장기 프로젝트를 추진할 방침이다.

당장은 ‘메이드 인 서울’이라는 브랜드 인증을 통해 중국 등 추격자들을 뿌리칠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는 브랜드가 나오면 서울 자체가 패션 도시가 될 수 있다는 구상이다. 내년에는 시에 스마트 산업복합시설(앵커시설)을 구축할 계획이다. 패션 생산과 유통, 문화 공간이 어우러진 복합단지다. 이곳에는 정보기술(IT)을 융합해 생산공정 일부를 자동화한 스마트 공장이 들어선다. 희망하는 봉제인들을 입주시킬 계획이다. 이와 함께 삼성이 운영하는 디자인 스쿨인 ‘사디’ 같은 디자인 아카데미도 운영할 계획이다. 패션 멘토와 멘티 프로그램으로 디자이너 꿈나무들이 원로 디자이너들에게서 멘토링을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도 기획 중이다.

서울시가 풀어야 할 숙제도 있다. 대기업의 지원이다. 전문지식과 노하우, 연구개발센터 설립, 마케팅 등에서 관련 기업들이 도울 일이 많기 때문이다. 컨설턴트 역할을 할 수 있는 삼성물산, LF 등 기업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인식 변화를 위한 역사관 건립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위한 작업도 추진하기로 했다. 서울의 패션산업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섬유산업의 역사를 정리하고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서울 창신동에 봉제역사관 ‘이음피움’을 내년 3월 개관한다. 지하 1층~지상 4층 규모로 건립하는 이음피움에서는 연중 패션봉제산업 기획 전시를 열고, 관련 상품도 판매한다. 서울시는 봉제인의 스토리를 발굴해 다큐멘터리도 제작할 계획이다.

마케팅 지원은 이미 시작했다. 의류제조업체와 서울시가 손잡고 공동 패션 브랜드를 출시한 것. 지난달 21일 공개한 ‘소그(서울+보그)’다. 2018년 봄·여름 시즌 상품부터 판매할 계획이다. 민간 사업자와 봉제업체들이 협업할 수 있도록 내년 초에는 협업 사업 공모전도 연다.

이수빈 기자 ls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