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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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간 매출 2000억원대 기계설비업체 A사의 연간 영업이익률은 3% 안팎이다. 수출 비중은 70%를 넘는다. 이 기업은 최근 내년도 사업계획을 전면 백지화했다. 사업계획의 가장 중요한 기준인 원·달러 환율 전망이 크게 빗나갔다는 판단에서다. 애초 책정한 내년 평균환율은 달러당 1125원. 이 회사 오너 K씨는 “환율 기준을 요즘 수준으로 내렸더니 내년 영업이익 전망치가 바로 적자로 돌아섰다”며 “3년 전 희망퇴직으로 인력의 20%를 줄였는데 또다시 직원을 내보내야 할 것 같다”고 한숨을 쉬었다.

1일 경제계에 따르면 주요 기업의 ‘2018년 경영계획’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최근 환율이 가파르게 하락한 가운데 금리와 국제 유가가 오름세를 보이면서다.

여기에 내년 1월부터 큰 폭의 최저임금 인상(16.4%)이 예정돼 있고 정부와 국회는 기업 생산성에 부담을 주는 근로시간 단축까지 논의하고 있다. 5대 그룹의 한 주력 계열사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최근 거시 변수들이 요동을 치면서 지난달 초 세운 내년 사업계획이 완전히 무력화됐다”며 “계획을 다시 짜느라 친분 있는 다른 기업 관계자들과 분주히 정보를 교환하고 있다”고 했다.
트리플 쇼크… "내년 경영계획 다 헝클어졌다"
수출기업들이 특히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최근 두 달 새 70원가량 떨어진 환율이 추가 하락 압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달러당 평균 1160원이던 환율은 최근 달러당 1080원대로 연중 최저치 수준으로 떨어진 데 이어 내년엔 1050원 아래로 뚫고 내려갈 것이라는 전망이 많아 채산성 악화가 불가피하다는 우려가 나온다.

내수기업이라고 사정이 다르진 않다. 지난달 30일 단행된 한국은행의 금리 인상은 충분히 회복되지 못한 소비와 투자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문재인 정부의 잇따른 친노동정책과 강화되는 기업 규제, 임금 인상 등도 기업의 수익성을 악화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 통상임금 범위 확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 기업의 인건비 상승 요인은 한 손에 꼽기도 모자랄 정도다.

한국은행이 지난달 30일 발표한 ‘통화정책방향 의결문’에는 “내수가 완만한 개선세를 이어가고 수출도 호조를 지속할 것”이라는 문구가 담겼다. 경기 회복세에 대한 이런 자신감은 6년5개월 만에 기준금리를 올린 배경이 됐다.

기업들의 속내는 다르다. 한은의 판단과 달리 ‘자신감’은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무역협회는 기준금리 인상에 대해 “기업의 채무상환 부담을 증가시키는 한편 우리 기업들의 수출 경쟁력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는 내용의 자료를 냈다.
트리플 쇼크… "내년 경영계획 다 헝클어졌다"
살얼음판 걷는 수출시장

올 들어 수출 흐름은 양호하다. 거의 매달 사상 최대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올해 유가증권시장 상장사의 영업이익도 사상 처음으로 190조원을 넘어설 전망이다. 하지만 항상 ‘불안한 성장’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주요인은 반도체 편중이다. 지난달 반도체 수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65.2% 늘어난 95억7000만달러를 기록했다. 전체 수출액(496억7000만달러)의 17.7%에 달한다. 수출뿐만 아니다. 이익 부문만 떼어내 살펴보면 편중 현상은 더 도드라진다. 올해 유가증권시장 상장사들의 1∼3분기 연결 기준 영업이익과 당기순이익 증가율은 27.7%, 34.1%였다. 여기서 삼성전자를 제외하면 10.3%와 17.4%로 반 토막이 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두 곳의 경영상황에 따라 한국 수출과 코스피지수 전체가 휘청대는 구조인 셈이다.

모든 업종이 그렇듯 반도체 시황도 마냥 좋을 수만은 없다. 지난달 26일엔 “메모리반도체 경기가 곧 정점을 찍을 것”이라는 모건스탠리 보고서 한 장에 삼성전자 주가가 하루 만에 5% 이상 곤두박질치기도 했다.

생산성은 그대로인데 인건비만

정부 출범 후 우후죽순으로 추진되고 있는 친(親)노동 및 반(反)기업 규제도 기업엔 큰 걱정거리다. 최저임금은 2020년까지 1만원이라는 목표치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매년 최소 15% 넘게 올라야 달성 가능한 수치다. 근로시간 단축 움직임은 기업들에 인건비 부담을 가중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국회 논의대로 주당 근로시간이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줄어들 경우 기업들이 추가로 부담해야 할 인건비는 연간 12조3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국경제연구원)된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통상임금 범위 확대, 휴일·연장근로 중복할증, 탈원전 기조로 인한 산업용 전기요금 인상 가능성 등의 악재도 순번을 기다리고 있다.

반면 생산성은 제자리걸음이다. 잘 팔리는 차량을 더 생산하고 싶어도 노조원이 쇠사슬을 몸에 두르고 작업을 방해할 정도로 강성 노조의 기세는 드세다. 경제계 관계자는 “저성과자 해고, 최저임금 산입범위 개편, 탄력근무제 등 기업들이 노조 측에 요구하는 제도 개편안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기업 경쟁력을 유지하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기업활동 옥죄는 법안

경영활동을 옥죄는 반기업 법안도 부담이다. 법무부와 공정거래위원회는 증권 분야에 한정적으로 도입한 ‘소비자 집단소송제’를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폭스바겐 사건, 가습기 살균제 사태 등과 같은 소비자 피해를 줄이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국내에 진출한 해외 기업들조차 “불필요한 소송이 남발되고 블랙컨슈머(민원이나 소송을 상습적으로 제기하는 소비자)가 늘어나는 등 기업 피해가 증가할 수 있다”고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제프리 존스 주한미국상공회의소 이사장).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전자투표제 및 집중투표제 의무화 등의 내용을 담은 상법 개정안도 기업들의 자유로운 경영권 행사를 제한하고, 경영권 분쟁에 악용될 수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법인세 인상 가능성도 잠재적인 악재다. 정부·여당은 순익(과세 표준 기준) 2000억원 이상 기업의 법인세율을 현행 22%에서 25%로 인상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대기업이 타깃이다. 정부 방안대로 법인세가 오르면 연간 2조6000억원가량의 세금이 더 걷힐 것으로 추산된다. 그만큼 기업 부담이 늘어나는 것이다.

안재석/좌동욱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