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투명경영·지배구조 개선에 도움 기대…정치화 가능성 배제해야
전문가 "핵폭발급 영향…2019년 '거수기' 주총 사라질 것"


600조원 이상의 기금을 굴리는 '주식시장의 큰손' 국민연금이 주주권 행사 강화에 나선다.

국민이 맡긴 소중한 돈을 제대로 투자해 기업 가치를 올리고 이를 통해 안정적인 수익을 확보하려는 취지에서다.

이를 위해 내년부터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를 공식 도입해 적용하기로 했다.

이렇게 되면 국민연금기금을 위탁받아 운용하는 자산운용사들도 국민연금을 뒤따를 것으로 보여 스튜어드십 코드 확산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국내 주요 대기업의 지분을 많이 가진 국민연금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재계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는다.

혹시 '경영간섭'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에서다.

◇ 국민연금 '종이호랑이' 신세 벗어나나?
국민연금이 주주권 행사 강화 카드를 꺼내 든 것은 사실 새로운 게 아니다.

그간 국민연금은 기회 있을 때마다 투자기업의 주요주주로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예를 들어 2013년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은 국민연금의 주주권과 의결권 강화를 내용으로 하는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을 만들었다.

당시 복지부는 경영성과가 저조하거나 지배구조가 취약한 투자기업을 '중점감시 대상'으로 지정해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추진하고, 경영진이 주주권을 훼손할 때는 주주대표소송에도 나서야 한다는 방안을 내놨다.

또 국민연금기금을 맡아 운용하는 위탁운용사도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지침을 따르도록 했다.

건전한 시장 감시자로서 구실을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2016년에는 전담팀을 꾸려 배당성향이 낮은 기업을 중점관리기업으로 지정, 관리하고 '기업과의 대화'란 방식으로 압박해 더 많은 배당을 요구하며 그래도 개선하지 않으면 '저배당 기업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외부에 공개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런 방안들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등 재계의 반대에 부딪혀 결실을 보지 못하고 결국 흐지부지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국민연금에는 항상 '주총 거수기', '종이호랑이'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많은 지분을 가지고도 주주로서 제역할을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오명은 국민연금이 자처한 측면이 크다.

주주총회에서 횡령·배임 등으로 사회적 물의를 빚은 재벌 사주의 사내이사 재선임 안건 등 민감한 사안에 기권하거나 중립 의사를 밝히기 일쑤고, 반대의견을 내는 경우도 적기 때문이다.

올해 7월 현재 기준으로 상장 회사의 정기 주총에서 의결권 행사를 공시한 기관투자자 중에서 대표 기관투자자인 국민연금의 반대율은 10%를 조금 넘긴다.

대신지배구조연구소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533개 상장사의 정기 주총에서 3천607개 안건 가운데 반대 의사를 표현한 것은 411건에 불과하다.

하지만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으로 국민연금이 '행동하는 주주'로서 앞으로 기업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배당확대와 경영 투명성 등을 요구하게 되면 더는 '주총 찬성 자판기'라는 소리를 듣지 않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한국기업지배구조원(CGS) 조명현 원장(고려대 경영학부 교수)은 "국민연금을 비롯한 연기금이 2018년에 스튜어드십 코드에 가입하면 핵폭발급 영향이 있을 것"이라며 "2019년 주주총회부터는 '거수기' 주총 대신 진지한 토론과 찬반투표가 있는 진짜 주총이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재 국민연금은 9월 현재 기준으로 기금적립금이 612조4천억원에 달하며, 이 중에서 국내주식에 127조2천억원(20.8%), 해외주식에 107조8천억원(17.6%)를 투자하고 있다.

국내채권에 285조4천억원(46.6%)으로 가장 많이 투자하고, 해외채권 24조원(3.9%), 대체투자 65조4천억원(10.7%) 등이다.

◇ 재계 반대 극복이 '관건'…복지부 "단계적 접근할 것"
국민연금이 현재 주요 투자기업에 주주로서 행사하는 권리라고는 고작해야 주총에 참석해 의결권을 행사하거나 배당확대를 요구하는 정도에 그친다.

의결권 행사마저도 반대의견은 드물어 거수기란 비판을 받고 있고, 민감현안에는 아예 기권표를 던져 주주권리를 포기하는 게 잦다.

기관투자자로서 역할을 못 하는 이런 국민연금과는 달리 선진국 연기금은 투자기업의 가치와 자산가치를 올려 수익성을 높이고자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고 있다.

글로벌 5대 연기금 중에서 네덜란드공적연금(ABP), 노르웨이국부펀드(GPFG), 미국 캘리포니아공무원연금(calPERS·캘퍼스), 캐나다 연금투자위원회(CPPIB) 4곳은 주주 가치를 높이고자 주주소송과 입법운동, 투자자 연대에 나서기도 한다.

ABP, GPFG, CPPIB 등 3곳은 사외이사 추천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며 투자 대상 기업의 경영에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특히 캘퍼스는 투자기업 중 문제 기업의 목록을 '포커스 리스트(Focus List)'로 작성해 공개하고 있다.

기업의 지배구조에 심각한 문제가 있거나 실적이 나쁜 기업의 리스트를 작성해 시장에 공개함으로써 공개적인 압박을 가하는 것이다.

ABP는 기업 경영진과의 대화 등을 통해 기업들이 노동 환경을 개선하거나 사회 책임 활동에 나서도록 독려해 기업 가치를 높이고 있다.

다른 선진국 연기금의 이런 적극적 주주권 행사에 발맞춰 국민연금도 기업 경영 투명성과 주주 가치 제고를 목표로 주주권 행사를 강화하려고 하지만, 재계는 기업 경영권을 간섭할 수 있다며 여전히 강한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

복지부와 국민연금은 이런 재계의 우려를 불식하고 스튜어드십 코드의 안정적 정착을 도모하고자 급하게 시행하기보다는 이해의 폭을 넓히며 단계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모색하고 있다.

박능후 복지부 장관은 1일 열린 제7차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에서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공식화하면서 "다만, 일부에서 기업 경영간섭 우려도 있는 만큼,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더라도 적용 범위와 대상 아주 제한적으로 시작해 국민적 공감대를 이뤄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조명현 원장은 스튜어드십 코드로 정부가 국민연금 등 공적연금을 통해 민간기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른바 '연금 사회주의' 논란을 벗고 안착하려면 자본시장법이나 대통령령 개정을 통해 국민연금이 위탁운용사에 의결권을 위임해 행사할 수 있게 해주면 된다"고 제안했다.

/연합뉴스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