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졸 9급서 차관까지…김제 청년 공직인생 분투기
1976년 7월6일 새벽 4시 열아홉 살 청년은 이불과 흰 남방 몇 장을 넣은 보따리를 둘러메고 부산진역에 내렸다. 전날 오후 4시 전북 김제역에서 대전 회덕역으로 올라가 다시 부산행 완행열차로 갈아타고 꼬박 12시간을 내려온 뒤였다. 여름이었지만 처음 온 도시에서 당장 그날부터 집을 구해 자야 한다는 압박감에 소년티를 갓 벗은 청년은 부산의 새벽이 추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서둘러 거제동의 부산생사검사소로 발길을 돌렸다. 그가 처음으로 부임한 곳이었다. 지난달 하순 취임 100일을 맞은 라승용 농촌진흥청장(차관급)의 공무원 생활 시작이었다.

그의 꿈은 공무원이 아니었다. 곡창지대인 김제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던 아버지의 사업이 중학교 때 급격히 안 좋아지면서 어쩔 수 없이 김제농고로 진학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웠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곳을 선택했다. “광주로 고등학교를 시험 봐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정형편이 안 좋으니까 도저히 갈 수가 없더라고요.”

라 청장(맨 오른쪽)의 김제농고 졸업사진.
라 청장(맨 오른쪽)의 김제농고 졸업사진.
농고에 다니면서도 농사지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당시 꿈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학교를 다니면서 닭 토끼 돼지를 키워 팔기도 했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학비는 시험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았다. 생활비가 필요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자 학교 친구들은 하나둘 취업을 나갔다. 농고라 실습한 농장 등에 취직했다. 그의 동기 졸업생 중 대학에 진학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는 실습을 나가지 않았다. 라 청장은 “정말 대학에 가고 싶었다”며 “집안 형편이 안 되니 장학금을 받으려면 시험을 잘 봐야 하니까 실습을 나가지 않고 숨어서 공부했다”고 회상했다.

학교가 끝나면 읍내 독서실로 갔다. 새벽 4시 반까지 공부하고 집으로 들어가 잠시 자고 아침에 보리밥 도시락 두 개를 싸들고 다시 나가는 생활이 반복됐다. 새벽에 집에 들어오면 어머니가 전기곤로에 밥을 끓여줘 그걸 먹고 잤다. 목표는 공주사범대였다. 당시 처지를 고려하면 선생님이 되는 게 가장 안정적이었다. 자정 무렵이면 머리도 식힐 겸 신문 사설을 베껴 적었다. “뜻도 몰랐죠. 졸려서 그랬어요. 당시 신문은 조사만 빼고 다 한문이었는데 그걸 베껴 쓰면 마음이 안정되고 잠도 쫓고 한문도 익힐 수 있었어요.” 이때 익힌 한문은 나중에 큰 힘이 됐다.

그렇게 6개월간 대입 시험 공부를 하던 때 독서실에서 동급생을 만났다. 친구는 농촌지도직 공부를 한다고 했다. 그런 게 있었는지도 몰랐다. 친구는 시험에 합격해 공무원이 됐다. 마음에 혼란이 왔다. 라 청장은 “친구는 바로 공무원이 됐는데 나는 대학에 가도 학비와 생활비는 물론이고 당장 네 명의 동생을 책임져야 하는데 자신이 없었다”고 했다. 대학에서 공무원 시험으로 튼 계기였다. 그리고 그해 치러진 농림직 9급 시험에서 1등으로 합격했다. 1등임을 알게 된 건 발령 번호가 1번이었기 때문이다.

전주=FARM 김재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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