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밤 서울 동대문 도매상가 누존 앞에 포장된 의류들이 쌓여 있다. 이곳에선 매일 온라인 쇼핑몰과 각 지역 소매상들이 전용 트럭을 대놓고 의류를 매입한다.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지난 27일 밤 서울 동대문 도매상가 누존 앞에 포장된 의류들이 쌓여 있다. 이곳에선 매일 온라인 쇼핑몰과 각 지역 소매상들이 전용 트럭을 대놓고 의류를 매입한다.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지난 27일 밤 11시 동대문 도매시장 DDP패션몰(옛 유어스) 상가에 도착한 홍해솔 씨(28)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석 달 전 온라인 패션몰 ‘미니걸스’를 창업한 홍씨는 “판매할 블라우스와 가방을 고르고, 패션 흐름도 조사하러 왔다”고 말했다. 온라인 패션몰 ‘비커밍27’을 운영하고 있는 윤예영 씨(27)는 “동대문에는 날마다 신상품이 나온다”며 “다른 업체보다 빨리 사들이기 위해 매일 2~3시간씩 둘러본다”고 말했다.

동대문 시장의 제조·물류 인프라를 바탕으로 패션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프랑스 파리,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는 1~2개월 걸리는 샘플 생산이 동대문에선 이르면 3일, 늦어도 7일 안에 가능하다. 중국 광저우 의류시장에서는 옷을 수백장 이상 사야 도매 거래가 이뤄지지만 동대문에선 다섯 벌만 구입해도 된다. 패션업체들은 원·부자재 조달, 제조, 물류 등을 걱정할 필요 없이 아이디어만 있으면 언제든 창업하고 디자인 등 핵심 경쟁력에 집중할 수 있다. 화웨이, DJI 등 ‘중국 스타트업의 고향’으로 불리는 중국 선전의 화창베이 전자상가처럼 서울 동대문 시장이 패션 스타트업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고 있다.

◆동대문 시장의 제조·물류 혁신

서울 신당동 DDP패션몰에서 한 남성이 여성복 도매의류매장에서 직원에게 문의하고 있다.
서울 신당동 DDP패션몰에서 한 남성이 여성복 도매의류매장에서 직원에게 문의하고 있다.
동대문 시장에는 원단·부자재 시장과 패턴·봉제·가공 공장부터 도매시장, 소매상가, 소형 택배업체 등이 밀집해 있다. ‘패션산업 밸류체인’이 한 지역에 몰려 있는 셈이다. 동대문에서 소량의 제품도 빠르게 생산하고 유통할 수 있는 이유다. 처음 창업한 패션 스타트업은 대부분 동대문 도매시장에서 옷을 골라 온라인몰에서 판매하며 사업을 키워 나간다. 동대문 패션타운 관광특구 관계자는 “10년 전만 해도 도매상가 방문객은 소매 옷가게를 운영하는 40~50대 자영업자가 많았는데 요즘은 온라인몰 사업자가 대부분이고 중·고등학생 창업자도 많다”고 말했다.
파리에선 제작 한 달 걸리는 의류 샘플… 동대문선 사흘이면 뽑아내
어느 정도 성장한 스타트업은 동대문의 원자재 시장과 공장 인프라를 활용해 자체 브랜드를 달고 옷을 제작한다. 동대문에 있는 3000여 개 원단가게에서 판매하는 원단 가짓수만 200만~300만 개에 달한다. 이곳에서 마음에 드는 원단을 구입한 뒤 근처 소규모 공장에 바로 제작을 의뢰할 수 있다. 종로, 창신동, 신당동 일대에는 옷의 틀을 짜는 패턴부터 봉제, 가공까지 단계별로, 또 소재와 품목별로 특화된 소규모 공장이 2만7000여 곳이나 있다. 면 티셔츠 패턴 전문 공장, 가죽 재킷 염색 가공 공장 등으로 전문화돼 있다. 한 패션업체 대표는 “프랑스 업체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게 동대문의 제조 속도”라며 “해외 제조업체에선 정해진 수량 외에 추가 생산이 거의 불가능해 시장 변화에 즉각 대응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자라’도 트렌드 조사

제품 생산 주기가 짧다 보니 동대문에선 매일 달라지는 패션 트렌드도 확인할 수 있다. 한 패션업계 관계자는 “세계 1위 제조·직매형(SPA) 브랜드 ‘자라’를 운영하는 인디텍스가 올해부터 동대문에서 트렌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한국 패션 스타일이 해외에서 인기를 끌면서 나타난 변화다. 알리바바 타오바오 등 중국 온라인몰에서는 이미 동대문 패션이 대세다. 온라인 판매업자들은 자사 제품을 ‘동대문 패션’ ‘동대문 스타일’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패션 생태계를 혈관처럼 연결해주는 소형 물류업체도 ‘동대문 패션’ 돌풍의 숨은 주역이다. ‘하이바 택배’라고 불리는 오토바이 배달업체가 대표적이다. 원자재를 수시로 공장에 전하고 제작이 끝난 제품을 다시 도매시장에 배달해준다. 동대문 부근 오토바이 운행이 늘자 서울시는 교통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2013년 혜화경찰서 건의로 종로에 택배 오토바이 전용 주차장도 조성했다.

‘사입 삼촌’이라고 불리는 도매의류 구매대행업자도 동대문 물류의 큰 축이다. 이들은 소매판매자 대신 도매시장에서 신상품을 구매한 뒤 옷 한 종류당 1000~2000원의 수고비를 받고 소매상에게 착불로 배송해준다. 제품은 이르면 당일, 늦어도 다음날 도착한다. 이 덕분에 경상도 등 비수도권에 있는 업체들도 동대문 제품을 수시로 구입할 수 있다.

이수빈 기자 ls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