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앙은행(ECB)이 다음달 26일 통화정책회의에서 양적완화 축소 여부와 관련한 내년도 정책을 발표할 전망이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7일 통화정책회의에서 제로 기준금리 등 정책금리 동결을 결정한 뒤 기자회견을 하고 “가을에 내년 정책을 조정할 것”이라며 “10월에는 정책조정 발표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드라기 총재는 또 12월까지 예정된 월 600억유로 규모의 양적완화 계획과 관련해 필요시 연장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긴축 나서려던 글로벌 중앙은행… '저물가 함정'에 빠졌다
다만 드라기 총재는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의 경기확장이 물가상승세로 이어지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그는 “유로화 환율의 변동성은 불확실성의 원천”이라며 모니터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미국과 일본 중앙은행 역시 이런 난제와 씨름하고 있다. 경기 회복에도 소비자물가가 좀체 오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주요국 중앙은행과 경제학자들이 ‘저물가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다양한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경기 회복에도 저물가 심화

올 들어 미국 유럽 일본 등 주요국 경기는 강한 회복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미국은 지난 1분기 1.2%(전기 대비 연율 기준)였던 경제성장률이 2분기 3.0%로 대폭 확대됐다. 유로존의 경제성장률은 1분기 1.9%로 미국을 능가하더니 2분기에는 2.2%로 회복세가 더 뚜렷해졌다. 일본은 2분기에 4.0%라는 높`은 성장률로 시장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하지만 이들 국가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별다른 변화가 없다. 미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 4월까지 2%대를 유지하다가 7월 1.7%로 낮아졌다. 유로존은 4월 1.9%까지 기록했다가 7월 1.3%로 떨어졌고, 일본은 0%대 물가 상승률이 지속되고 있다.

경제학 이론에 따르면 경제성장률이 높아지면 물가 상승 폭도 커진다. 수요·공급 법칙이 작용하면서 ‘경기 회복→실업률 하락→임금 상승→기업의 제품 가격 인상’으로 이어진다. 현재 주요국 경제는 실업률 하락과 임금 상승 간 연결 고리가 끊어진 상태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경기가 회복 주기에 접어든 이후 주요국 중앙은행은 통화정책 기조를 완화에서 긴축으로 전환하는 최적의 시점을 잡기 위해 물가상승률을 예의주시해 왔다. 경제성장률과 물가상승률이 따로 노는 현상이 나타나자 통화정책에도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 속도가 당초 예상에 못 미치고, 유로존의 테이퍼링(양적완화 규모 축소) 개시 시점이 늦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저임금 일자리 증가가 주요 원인”

경기 회복 초기만 해도 중앙은행 관계자와 경제학자들은 회복세가 충분히 강하지 않아 물가가 뛰지 않고 있다고 판단했다. 시간이 지나면 저물가 현상이 자연스레 사라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저물가 상황이 예상보다 오래가자 이를 설명하는 다양한 가설을 내놓기 시작했다.

ECB는 노동시장의 구조 변화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드라기 총재는 경기 회복 과정에서 임시직·일용직 등 저임금 일자리가 주로 늘어난 것이 물가 상승폭 확대를 가로막고 있다고 6월 지적했다. 일본에서도 비슷한 분석이 제기됐다.

미국 중앙은행(Fed)에서는 경제 주체들의 심리 문제를 핵심 원인으로 꼽는 목소리가 나왔다. 레이얼 브레이너드 이사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저물가 시대가 오랜 기간 이어진 탓에 기업과 개인들이 앞으로도 저물가 시대가 지속될 것으로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경제구조 근본적 변화’ 가설도

일부 전문가는 경제구조의 보다 근본적인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란 주장을 펼치고 있다. 엔리케 마르티네스-가르시아 미국 댈러스연방은행 이코노미스트는 7월 발표한 논문을 통해 세계화가 저물가의 주범이라고 지목했다.

세계적인 분업체계가 점차 확산되면서 기업들이 경기 회복기에 임금 인상 압박이 높아지면 임금을 올려주는 게 아니라 노동력이 싼 해외로 아웃소싱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노동조합 운동의 퇴조가 저물가를 야기했다는 가설을 내놨다. 국제결제은행(BIS)이 6월 발표한 연차보고서는 노조운동과 임금 간 강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지난 40년간 세계 노동자의 노조 조직률이 반 토막 나면서 경기 회복기에도 임금이 크게 오르지 않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찰스 에번스 시카고연방은행 총재는 아마존 구글 등 초거대 인터넷 기업의 등장을 저물가 원인으로 꼽았다. 이들 기업이 제조업 유통업 등 기존 산업에 침투해 가격 파괴를 주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동윤 기자 oasis9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