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부가 31일 기아차 통상임금 1심 재판에서 '신의성실 원칙(이하 신의칙)'을 배제하고 임금 소급 지급을 선고하자, 기아차와 마찬가지로 현재 통상임금 소송을 겪고 있는 100여 개 기업들의 근심이 커졌다.

개별 기업의 상황에 따라 신의칙 적용 여부에 차이가 있겠지만, 업계와 국회까지 나서 '경영 위기'를 호소했던 기아차가 결국 임금 소급을 피하지 못한 만큼 향후 통상임금 판결에서 사측이 신의칙을 인정받고 부담을 벗기가 더 까다로워진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31일 하태경 의원(바른정당)실에 따르면 2013년 이후 올해 6월 말까지 통상임금 소송을 겪은 100인 이상 사업장은 전국 192개에 이르고, 이 가운데 115개는 여전히 소송 중이다.

192개 기업을 업종별로 보면, 제조업(73개)이 가장 많았고 운수업(47개)과 공공기관(45개) 등이 뒤를 이었다.

현재 통상임금 소송이 진행 중인 기업은 서울메트로, 기업은행, 현대모비스, 두산인프라코어, 현대제철, LS산전, 쌍용자동차, 강원랜드, 현대로템, STX조선해양, 현대위아, ㈜효성, 두산엔진, 두산중공업, 한화테크윈, 현대차, 현대미포조선, 한국항공우주산업 등이다.

주요 대기업·공공기업들이 대거 포함됐다.

한국경제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종업원 450명 이상'의 중견·대기업만 따져도 현재 무려 35곳이 99건(평균 2.8건)의 통상임금 소송전을 치르고 있다.

소송 진행 단계별로는 1심 계류(48건·46.6%)가 가장 많았고, 이어 2심(항소심) 계류(31건·30.1%), 3심(상고심) 계류(20건·19.4%) 순이었다.

통상임금 소송의 최대 쟁점으로는 '소급지급 관련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 인정 여부(65.7%)', '상여금 및 기타 수당의 고정성 충족 여부'(28.6%)가 꼽혔다.

2013년 대법원은 과거 노사가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하지 않는 것으로 합의해 임금 수준 등을 결정했다면, 이후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하더라도 이전 임금을 새로 계산해 소급 요구하지 못한다는 취지로 판결한 바 있다.

다만 소급지급 시 경영 타격 가능성 등을 조건으로 달았다.

'고정성'은 '근로자가 제공한 근로에 대해 그 업적, 성과, 기타 추가적 조건과 관계없이 당연히 지급이 확정된 상태'를 뜻한다.

어떤 기업에서 상여금이나 각종 수당이 통상임금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설문 대상 35곳 가운데 25곳이 통상임금 소송 패소 시 지연이자, 소급분 등을 포함한 비용 추산액을 밝혔는데, 합계가 8조3천673억 원에 이르렀다.

이는 이들 기업의 지난해 전체 인건비의 36%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유환익 한국경제연구원 정책본부장은 "통상임금 정의 규정을 입법화하고 신의칙 등에 대한 세부지침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며 "신의칙 인정 여부를 따질 때도 관련 기업의 재무지표뿐 아니라 국내외 시장환경, 미래 투자 등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서울연합뉴스) 신호경 기자 shk999@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