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가 민간 자본으로 추진하기로 했던 대규모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을 잇달아 재정 투입 사업으로 전환하고 있다. 이용자의 부담을 낮추고 공공성을 강화한다는 게 정부 취지다. 일부 사업은 ‘부적합’ 판정이 났는데도 ‘선심성 사업’으로 밀어붙이거나, 10년 넘게 민자로 추진해 오던 사업을 갑자기 재정사업으로 돌려 민간 사업자와 갈등을 빚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178조원에 이르는 공약 이행 재원 확보를 위해 강도 높은 지출 절감에 나서기로 한 정부가 재정개혁의 원칙을 스스로 훼손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수도권 GTX 15조·평택~오송 고속철 3조…민자 SOC에 줄줄이 나랏돈 투입
1일 기획재정부와 국토교통부 등에 따르면 정부는 사업비 7조5492억원이 투입되는 서울~세종고속도로 사업 전체를 재정사업으로 바꾸겠다고 지난달 발표한 데 이어 15조원 이상이 드는 수도권 광역급행철도망(GTX) 사업 역시 대규모 재정 투입을 본격화하고 있다.

하지만 GTX의 A노선(경기 파주~화성 동탄)을 제외한 나머지 노선은 기재부의 예비타당성 조사 문턱도 넘지 못했다. 특히 B노선(인천 송도~경기 마석)은 사업성이 낮다는 이유로 한 차례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그럼에도 국토부는 김현미 장관 취임 이후 2025년 개통을 목표로 제시하며 밀어붙이려는 움직임이다.

3조원이 투입될 평택~오송 간 고속철도 복복선화 사업 역시 민간 사업자를 배제하고 재정사업으로 전환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혔다. 재정당국에서조차 178조원 재원 마련이 물 건너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정부가 대규모 재정투입을 본격화하려는 수도권 광역급행철도망(GTX) 사업은 정치인 출신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취임 이후 급물살을 타고 있다. 김 장관은 지난달 7일 ‘수도권 전철 급행화 추진방안’을 발표하면서 “GTX A·B·C노선을 2025년까지 모두 완공하겠다”고 선언했다.

15조원 이상 드는 GTX 사업 재원은 민간 50%, 정부 35%, 지방자치단체(경기도·인천시 등) 15%로 나눠 분담하기로 했다. GTX에만 최소 5조2000억원 이상의 국고가 투입된다는 의미다.

◆‘부적합’ 판정까지 받았는데…

GTX 사업은 A노선 중 서울 삼성동과 경기 동탄을 잇는 일부 구간만 지난 3월 착공한 상태다. B·C는 아직 예타 문턱을 넘지도 못했다. B노선은 2014년 예타 통과에 실패했다. 국토부와 인천시는 지난해 12월 사업성을 높이기 위해 경기 마석(남양주)까지 연장하는 수정안을 제시했지만 기획재정부가 올해 2월 예타 대상 사업에서조차 제외했다.

국토부는 민자사업으로 추진해오던 평택~오송 간 고속철도 복복선화 사업 역시 재정사업으로 전환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 사업은 수서발고속철도(SRT) 개통으로 포화상태에 이른 평택~오송 간 고속선 용량 확충을 위해 현대산업개발이 지난해 국토부에 제안했다.

재정당국인 기재부는 실세 정치인 장관을 앞세운 국토부의 이 같은 ‘SOC 독주’에 속앓이만 하고 있다. 그동안 수차례 퇴짜를 놨던 국토부의 GTX 사업추진계획 발표에는 “사전협의가 전혀 없었다. 국토부의 일방적인 희망사항일 뿐”이라며 불쾌해하는 반응도 나왔다.

◆민간사업자 반발

오랜 기간 민자사업으로 추진해오던 것을 갑자기 재정사업으로 돌리면서 민간사업자와의 갈등도 커지고 있다. 서울~세종 고속도로 건설 사업이 그런 예다. 당초 정부는 1구간 서울~안성(72㎞)은 한국도로공사, 2구간 안성~세종(59㎞)은 민간사업자로 나눠 건설을 추진해왔는데 공공성 강화를 내세워 2구간도 도로공사에 맡기기로 했다.

이에 건설업계는 1일 정부의 재정사업 전환을 철회해달라며 국회 5당 정책위원회의장과 국토부에 건의문을 전달했다. 협회는 건의문에서 “안성~세종 구간은 민간사업 제안 업체가 10년간 공들여 사업을 추진해왔는데 불과 두 달 만에 민간 제안 사업 철회를 통보해왔다”며 “그동안 이 사업에 공들여온 민간 회사들은 손실이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헛구호 된 ‘SOC 지출 절감’

재정당국에서는 “벌써부터 이래서 어떻게 ‘178조원 공약가계부’를 짜겠느냐”는 불만이 흘러나온다. 새 정부의 국정과제 재원조달 방안 중 지출절감 등 재정개혁에 배정된 몫은 무려 95조원에 이른다. 이를 위해 정부는 대표적인 재량지출 사업인 SOC 예산부터 대폭 줄여나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정부의 잇단 SOC 사업 추진 결정으로 이 같은 원칙과 기조는 모두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