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전희성 기자 lenny80@hankyung.com
일러스트=전희성 기자 lenny80@hankyung.com
1988년 미국 미네소타주에 살던 엔지니어 스콧 크럼프는 두 살짜리 딸에게 줄 장난감을 만들고 있었다. 그는 폴리에틸렌과 캔들왁스를 섞은 혼합물을 글루건에 넣어 한 겹씩 쏘아서 쌓아 올렸다. 크럼프는 주말마다 이 과정을 반복해 개구리 모양 장난감을 만들었다. 그는 플라스틱 소재에 열을 가해 부드럽게 녹인 뒤 층층이 쌓아 올려 입체 형상을 만드는 과정을 자동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크럼프는 부엌과 차고를 오가며 장난감 개구리를 만들기 시작한 지 1년 뒤인 1989년 새로운 3차원(3D) 프린팅 기술에 대한 특허를 내고 스트라타시스를 창업했다.

새 방식의 3D 프린팅 기술 개발

크럼프는 압출 적층(FDM) 방식의 프린팅 기술을 고안했다. 앞서 개발된 광경화 적층(SLA) 방식의 3D 프린터가 레이저 광선으로 액화수지를 굳혀서 성형하는 것과 달리 FDM은 고체 필라멘트를 녹여 노즐로 사출해 층층이 쌓아가면서 제품을 제작하는 방식이다.

FDM 방식 3D 프린터는 SLA 방식에 비해 모형의 정밀도가 떨어지지만 장비 가격이 10분의 1 수준이다. SLA 방식을 고안한 척 헐이 설립한 3D시스템즈는 주로 부품 제조 등을 위한 고가 3D 프린터를 생산했다. 스트라타시스는 프로토타입(시제품)을 다양하게 제작해보는 용도로 3D 프린터가 널리 활용되도록 하는 데 집중했다.

크럼프는 자사 공식 블로그를 통해 “개구리 장난감을 만들어보면서 새로운 디자인의 시제품을 제작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꼈다”며 “그때 느낀 일종의 좌절감은 FDM 기술을 개발해 쉽게 시제품을 제작하는 3D 프린터를 출시하는 원동력이 됐다”고 밝혔다.

크럼프는 가족과 친지들의 자산을 끌어모아 26만4000달러를 투자해 1992년 스트라타시스의 첫 산업용 3D 프린터 모델인 ‘3D 모델러’를 시장에 출시했다. 창업 후 첫 제품을 내놓기까지 3년이란 인고의 시간이 흘렀다. 가격이 13만달러로 고가였기 때문에 구매 고객이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우선 성능을 높여 기업 고객을 공략해야겠다고 판단했다. 벤처캐피털 배터리벤처스로부터 추가 자금을 투자받아 냉장고 크기의 25만달러짜리 신제품을 생산하면서 판매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쉽게 시제품 제작할 수 있어

스트라타시스는 1994년 미국 나스닥시장에 상장해 570만달러를 모았다. 시제품 제작용 3D 프린터 개발에 본격 투자했다. 크럼프는 나스닥에 상장한 이듬해 1월 IBM의 신속조형(rapid prototyping) 관련 지식재산권을 사들였다. 또 FDM 기술과 매우 비슷한 압출 방식의 소형 3D 프린터를 개발하고 있던 16명의 IBM 소속 엔지니어도 영입했다.

신속조형 분야에서 스트라타시스는 기술을 선도하는 기업이 됐다. 새로운 제품을 제작하기 위해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시제품을 제작했다 폐기하고 시안을 수정하기를 반복해야 한다. 잉크젯프린터로 파일이 전송되면 활자나 그림과 같은 2차원 이미지를 인쇄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3D 프린터는 도면을 읽어 입체 형상을 바로 출력할 수 있다. 수정된 시안에 따라 바로 시제품을 제작해 직접 보고 만지면서 설계를 검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3D 프린터가 소비자 맞춤형 생산·유통을 기본으로 하는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로 꼽히는 이유다.

스트라타시스와 크럼프 회장은 2012년을 기점으로 전환점을 맞았다. 당시 3D시스템즈와 함께 미국 3D 프린터 시장의 70% 정도를 양분하던 스트라타시스가 이스라엘 업체 오브제를 인수합병(M&A)해 몸집을 불렸다. 오브제의 시장점유율은 15%였다. 스트라타시스가 합병 회사 지분의 55%, 오브제가 45%를 소유하기로 했다.

CIO 맡아 기술혁신 주도

크럼프 회장은 오브제와의 합병을 마무리한 뒤 스트라타시스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내놓고, 이사회 의장 겸 최고혁신책임자(CIO)로 취임했다. 발명가이자 엔지니어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서였다. 오브제 CEO인 데이비드 레이스가 합병회사 CEO를 맡아 제품 판매전략을 주도했다.

크럼프 회장은 “CEO일 때 제품 개발에 전념할 수 없어 아쉬웠다”며 “CIO로서 직접디지털제조(DDM) 등 신제품 개발 등에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DDM이 부품은 물론 완제품의 맞춤 제작으로 제조업 혁신을 이끌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FDM 기술을 개발한 이후로도 분리식지주시스템(BASS) 등 기술혁신에 기여했다. 3D 프린팅 혁신을 주도해 엔지니어들이 새로운 제품을 제작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개인적으로 가장 보람된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가정용·교육용 시장도 공략

2013년 스트라타시스는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둔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메이커봇을 인수해 개인용 3D 프린터 시장 확대라는 또 다른 이정표를 세웠다. 휴렛팩커드(HP)와 손잡고 2010년부터 소형(소비자용) 3D 프린터 제조·판매를 추진해왔지만 2012년 계약 중단으로 무산된 뒤였다.

스트라타시스가 이 시장에서 새로운 파트너로 선택한 메이커봇은 2000~3000달러 수준의 보급형 3D 프린터를 주로 제작하는 회사다. 일반 가정에서도 원하는 디자인의 도면을 인터넷에서 찾아 내려받으면 3D 프린터로 인테리어 소품, 장난감 등을 즉석에서 만들 수 있다.

스트라타시스는 3D 프린터 시장과 함께 성장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는 지난해 세계 3D프린터 시장 규모가 46만 대에 이르렀고, 2020년에는 670만 대 규모로 확대될 것으로 내다봤다. 기업용뿐 아니라 가정용·교육용으로 시장이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메이커봇 인수로 업계 최대 업체가 된 스트라타시스의 지난해 매출은 6억7245만달러(약 7743억원)에 달했다.

추가영 기자 gych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