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들어 대형 조선회사들의 잇단 수주 낭보에도 불구하고 협력사들은 극심한 일감 부족으로 빈사지경에 내몰리고 있다. 2015년 하반기부터 이어진 ‘수주절벽’ 충격이 이제야 협력업체들에 밀어닥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만 무려 200곳에 이르는 조선 협력업체가 문을 닫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4일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현대삼호중공업 현대미포조선 등의 협력업체 모임인 ‘조선 5사 사내협력사연합회’가 자체 분석한 결과 올해 200여 개 협력업체가 폐업 절차를 밟을 것으로 예상됐다. 연합회에 소속된 조선 5사 협력사는 616곳이다. 이 가운데 3분의 1가량이 도산 공포에 몸서리를 치고 있는 것이다. 올 들어 삼성중공업 협력사만 30여 곳이 폐업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 협력사 "일감 절벽 이제 시작"
연합회 관계자는 “올 상반기까지 90여 곳이 문을 닫아 근로자 1만5000여 명이 일자리를 잃을 가능성이 높다”며 “수주절벽이 지난해 말까지 이어진 점을 고려하면 협력사들의 일감은 내년 말까지 말라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올 들어 현대중공업 등 조선사가 잇달아 수주 계약을 따내고 있는데도 협력업체들이 무더기로 도산 위기에 놓인 이유는 수주산업 특유의 현금흐름 탓이다. 통상 조선사가 선박을 수주하면 선수금을 받고 6개월에서 1년 뒤 선박 건조에 들어간다. 약 2년간 배를 짓는 동안 서너 차례에 걸쳐 돈을 받는다. 이 때문에 당장 수주가 끊겨도 협력업체들은 과거 조선사의 수주로 받아놓은 일감으로 1~2년간은 근근이 버틸 수 있다. 2015년 하반기에 시작된 수주절벽 여파가 올 들어서야 협력업체에 밀려드는 이유다.

조선업계는 지금과 같은 상황을 농사의 춘궁기에 빗대는 ‘보릿고개’로 표현한다. 전년도 가을에 수확한 양식이 바닥난 상황에서 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은 5~6월이다. 경남 거제에 사업장을 두고 있는 선박배관 설비업체 동진기업의 곽세윤 대표는 “많은 업체들이 앞으로 1년여 남은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무너질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최근 대형 조선사들이 해외에서 수주를 재개했지만 이미 자금이 바닥난 협력업체엔 ‘그림의 떡’이다. 선박의 경우 통상 수주계약 후에 1년 가까이 지나야 건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협력사 대표는 “일감 감소로 직원들이 많이 떠나면서 업체마다 20억원이 넘는 퇴직금이 밀려 있다”며 “하지만 이를 지급하기 위한 은행권 대출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숨을 쉬었다.

협력사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타개책을 모색하고 있지만 좀처럼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다. 대형 조선사조차 10조원 규모의 자구계획을 마련하고 구조조정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협력사 위주의 정부 지원책을 바라기는 어려운 여건이다. 홍성인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내년 상반기까지 조선사의 일감이 계속 모자랄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협력사의 추가 인력 조정은 불가피하다”고 분석했다.

조선 5사 사내협력사연합회는 최근 생존을 위한 자구안을 만들어 조선사에 제안서를 보냈다. 원청업체인 조선사가 협력업체를 정리하기 전에 협력사들이 먼저 비슷한 업종을 묶어 통폐합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김수복 조선 5사 사내협력사연합회 회장은 “비슷한 분야의 협력사끼리 회사를 합병해 줄도산만은 막아보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다”며 “내년 하반기 일감이 회복될 때까지 회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 연합회는 지난해 6월 조선사와 협력사들이 함께 생존할 방안을 마련해보자는 취지로 출범했다.

조선업계에서는 2018년 하반기나 돼야 일감이 과거 수준으로 회복될 것으로 보고 있다. 영국 조선·해운 분석기관인 클락슨은 올해 전 세계 선박 발주량을 2140만CGT(표준환산화물톤수)로 예상했다. 지난해(1117만CGT)보다 늘어난 것이지만 2011년 이후 5년간 평균 발주량(4200만CGT)에 비하면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박재원 기자 wonderfu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