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의 모바일 통합칩셋 ‘엑시노스’는 갤럭시 시리즈에만 공급된다. LG전자 화웨이 샤오미 등의 다양한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퀄컴의 통합칩셋 ‘스냅드래곤’과는 상황이 딴판이다. 두 칩셋의 성능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그래서 소비자들은 ‘삼성전자가 기술보안 때문에 일부러 엑시노스를 갤럭시에만 공급한다’고 추측했다.

실상은 달랐다. 삼성전자는 엑시노스 외부판매를 시도했지만 퀄컴이 직접 막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퀄컴은 이동통신에 필수적인 ‘표준필수특허’ 사용권을 무기로 약 25년간 삼성전자에 ‘모뎀·통합칩셋 외부판매 금지’란 족쇄를 채웠다. 이 같은 퀄컴의 불공정행위는 공정거래위원회가 최근 공개한 ‘퀄컴의 시장지배적지위 남용행위 등에 대한 사건’ 의결서(법원 판결문 성격)를 통해 확인됐다.
퀄컴의 '갑질'…삼성 엑시노스 외부판매 막았다
◆1993년부터 칩셋 판매 막아

공정위는 의결서를 통해 “삼성전자는 퀄컴과 체결한 특허 라이선스 사용 계약에 따라 자가소비용 외에 다른 휴대폰 제조사에는 자사의 모뎀칩셋을 판매하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퀄컴이 표준필수특허를 무기로 모바일 칩셋 경쟁사인 삼성전자의 외부판매를 막았다는 의미다.

퀄컴의 특허족쇄는 2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성전자는 1993년 퀄컴으로부터 2세대 이동통신(CDMA) 표준필수특허를 활용해 휴대폰을 제조·판매·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대신 퀄컴은 모뎀칩셋과 관련해선 조건을 붙였다. 퀄컴과 삼성전자는 계약서에 ‘삼성전자가 자체조달용 모뎀칩셋을 제조하는 것은 허용하지만, 모뎀칩셋을 다른 사업자에 판매하면 안 된다’는 내용을 넣었다. 공정거래법에 위배되는 내용이다.

◆무리한 협상 조건 제시

삼성전자가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다. 2011년 모바일 칩셋 시장은 모뎀칩셋,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그래픽처리장치(GPU) 등을 한 칩에 모은 통합칩셋 중심으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삼성전자는 퀄컴에 “모뎀칩셋 외부판매를 막은 불공정 계약을 고쳐 달라”고 수차례 요청했다. 모뎀칩셋을 외부에 팔지 못한다는 것은 통합칩셋 영업도 할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됐기 때문이다. 실제 삼성전자가 다른 스마트폰업체에 통합칩셋 구매 가능성을 타진하자 “퀄컴의 특허공격을 안 받는다는 보증을 해주면 사겠다”는 답이 돌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의 ‘외부판매 허용’ 요구에 퀄컴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을 걸었다. ‘삼성전자 칩셋을 쓰는 스마트폰업체가 퀄컴에 특허료를 지급하지 않으면 삼성전자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새로운 계약서를 내놓은 것. 일단 외부판매 족쇄부터 풀기 위해 삼성전자는 퀄컴에 수용 의사를 전했지만 퀄컴은 갑자기 “60일만 특허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더 어려운 조건을 제시했다. 협상은 2년 넘게 이어졌고 2013년 퀄컴은 “계약 개정은 어렵다”는 의사를 삼성전자에 통보했다.

◆점유율 하락 우려한 퀄컴

퀄컴의 몽니는 삼성전자 엑시노스 외부판매가 시작되면 스냅드래곤의 점유율이 크게 하락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퀄컴이 삼성전자의 모뎀칩셋 외부판매를 허용한다는 것은 결국 통합칩셋 판매도 열어준다는 의미”라며 “퀄컴으로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고 싶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퀄컴의 특허 남용을 조사한 공정위는 지난해 12월 퀄컴에 “특허 계약을 맺는 경우 판매처 제한, 칩셋 사용권리 제한 등 부당한 제약조건 요구를 금지한다”는 시정명령을 내렸다. 삼성전자가 퀄컴에 계약 수정을 요구하면 퀄컴은 들어줘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퀄컴은 ‘잘못한 게 없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퀄컴은 지난달 서울고등법원에 ‘시정명령 효력정지 가처분’과 ‘시정명령 취소’ 소송을 제기하며 공정위의 시정명령을 거부하고 있다. 전자업계에선 3~4개월 뒤 결정될 효력정지 가처분의 인용 여부에 주목하고 있다. 만약 가처분이 인용되면 퀄컴은 공정위와의 소송이 끝날 때까지 시정명령을 무시할 수 있다. 보통 공정위와 글로벌 업체의 시정명령 취소 소송은 3~4년 걸린다.

■ 모뎀칩셋

휴대폰의 음성·데이터 정보를 이동통신 표준에 따라 가공해 신호로 바꾸고, 다른 휴대폰에서 받은 신호를 음성이나 데이터로 변환하는 모바일칩셋. 미국 퀄컴이 모뎀칩셋 제조에 꼭 필요한 ‘표준필수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최근엔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와 모뎀칩셋, 그래픽처리장치 등을 한 칩에 넣은 ‘통합칩셋’이 널리 쓰이고 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