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실 20명으로 시작한 '삼성 심벌'…1등 기업 초석 다진 인재 산실
지난 58년간 삼성그룹을 이끌어온 ‘실(室)’이 해체됐다. 비서실→구조조정본부→전략기획실→업무추진실→미래전략실 등 이름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삼성인 사이에선 항상 ‘실’로 불려온 삼성의 컨트롤타워다. 2008년 삼성 비자금 사건을 촉발시킨 김용철 씨가 책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삼성을 이해하려면 ‘실’을 알아야 한다”고 썼던 곳이다.

소병해 현명관 이학수 김순택 등 역대 실장들은 삼성의 ‘넘버2’로서 이병철 창업주, 이건희 회장 등 오너를 보좌해 굴지의 글로벌 기업 삼성을 일궈냈다. 이런 ‘실’이 최지성 실장을 마지막으로 굴곡진 역사를 뒤로하고 막을 내린다. 삼성 고위관계자는 “삼성에서 ‘실’이 해온 역할은 공(功)이 7, 과(過)가 3 정도”라며 “실 해체로 삼성은 계열사 독립경영이라는, 창립 이래 가장 큰 실험에 나선다”고 말했다.

◆삼성물산 비서실로 출발

‘실’은 1959년 조직된 삼성물산 비서실에서 시작됐다. 이 창업주는 계열사 관리를 위해 당시 주력회사인 삼성물산에 비서실을 설치했다. 초기 인력은 20명에 불과했지만 점차 최고 인재가 모였다.

비서실의 위상이 높아진 건 1970년대부터다. 송세창 씨와 소병해 씨가 각각 실장을 맡으면서 핵심 조직으로 자리잡았다. 최근 ‘정유라 특혜 지원 의혹’으로 한국마사회장에서 물러난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은 이 회장이 신경영선언을 한 1993년부터 약 3년간 실장을 맡아 신경영을 뿌리 내리게 한 인물이다.

당시 비서실은 삼성전관(현 삼성SDI) 삼성코닝 삼성중공업 삼성전자 호텔신라 등을 설립하거나 인수해 그룹 성장을 견인했다. 1991년 LCD(액정표시장치) 사업을 어디서 하느냐를 둘러싸고 삼성전자와 삼성전관이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 삼성전자로 교통정리해 사업을 키웠다. 1990년대 초 걸프전 발발, 김일성 사망 소식 등을 안기부보다 삼성 비서실이 먼저 알았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존재감은 커졌다.

◆재계의 청와대 ‘구조본’

1997년 외환위기를 맞자 이듬해 초 삼성 비서실은 구조조정본부로 개편됐다. 1996년 13대 비서실장으로 선임된 이학수 전 삼성물산 고문은 구조조정본부장을 맡아 각 계열사의 강력한 구조조정을 총지휘했다. 당시 삼성전자는 대대적인 분사와 매각을 단행해 4만7000여명의 인력을 3만8000여명으로 줄였다. 이런 군살빼기는 이후 휴대폰·반도체 호황과 어우러져 엄청난 이익을 내는 토대가 됐다. 삼성자동차 매각 등을 주도한 곳도 구조본이다. 이 회장의 신경영도 구조본을 통해 꽃을 피웠다.

◆전략기획실 폐지와 부활

구조본은 순기능이 컸지만 ‘황제 경영’을 보좌하는 기구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06년 안기부 X파일 사건이 터지면서 해체 압력을 받자 삼성은 구조본을 전략기획실로 축소했다. 이듬해 삼성 비자금 사건이 터지면서 삼성은 특검의 수사를 받게 됐다. 수조원대 차명계좌 등 불법행위가 드러나자 2008년 4월 이 회장은 경영 일선 퇴진과 함께 전략기획실 해체 등 경영쇄신안을 내놨다. 비서실장부터 구조본 본부장, 전략기획실장 등 18년간 그룹 2인자의 자리를 지킨 이학수 고문도 이때 물러났다. 해체된 전략기획실은 50여명 수준의 업무지원실로 축소됐다.

◆그룹 컨트롤타워 역사 속으로

2010년 3월 ‘애플발(發) 폭풍’ 속에 경영에 복귀한 이 회장은 8개월 만에 컨트롤타워를 복원했다. 업무지원실은 지금의 미래전략실로 되살아났다. 제일모직 경리과 출신의 이학수 사단으로 불리던 이들이 대거 퇴진하고 삼성SDI 출신인 김순택 부회장이 미래전략실의 첫 수장을 맡았다. 삼성은 전열을 정비해 애플을 따라잡고 스마트폰 세계 1위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 회장의 형인 이맹희 씨가 2012년 초 상속소송에 나서는 등 분란이 일자 김 실장은 책임을 지고 1년 반 만에 자리에서 내려왔다.

이 회장은 신경영 19주년 기념일이던 2012년 6월7일 최지성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을 미래전략실장으로 임명했다. 비서·재무 출신이 아니라 첫 현장 영업 출신인 최 실장은 지난 5년간 삼성전자 등의 사업경쟁력을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받는다.

미래전략실 해체는 2014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서면서 검토되기 시작했다. 지난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때 헤지펀드 엘리엇으로부터 ‘법적 근거가 없다’는 공격을 받은 미래전략실은 작년 12월 국회 청문회 때 이 부회장이 “국민에게 부정적인 인식이 있다면 없애겠다”고 약속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박재원 기자 wonderfu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