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은 특정한 목적을 위해 소비자가 자신의 재산을 관리·처분할 권한을 금융회사 등에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이 신탁시장의 국내 규모는 2013년 154조원에서 지난해 9월 710조원으로 불어났다. 외형만 보자면 다섯 배가량으로 커졌다.

하지만 선진국과 비교하면 아직 멀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신탁시장 규모는 한국이 42.7%에 불과한 반면 미국은 590%, 일본은 171%에 달한다. 신탁에 대한 금융소비자의 인식도 금융투자상품 중 하나일 뿐이다. 까다로운 규제와 엄격한 운용조건 탓에 매력도가 떨어지는 상품이다.

금융위원회가 12일 내놓은 신탁업 개편 방안에는 이 같은 신탁시장을 대대적으로 활성화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신탁을 저금리·고령화 시대의 종합자산관리 수단으로 키우겠다는 게 금융위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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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입 문턱 확 낮춘다

개편 방안의 핵심은 신탁업 진입 문턱을 낮추고 신탁을 통한 자산운용 범위를 대폭 확대한 데 있다. 지금은 자본시장법에 따라 신탁을 금융투자업의 하나로 규제한다. 이 때문에 은행, 증권사, 보험사 등 기존 금융회사가 신탁업 인가를 받아 겸업하는 형태다.

인가 조건도 까다롭다. 종합신탁업자는 자기자본 250억원 이상, 금전신탁사업자는 130억원 이상, 부동산신탁업자는 100억원 이상이어야 한다. 신탁업으로 운용 가능한 재산도 일곱 가지로 제한하고 있다. 예·적금 등 현금, 부동산, 유가증권, 동산, 지상권·전세권 등 부동산 권리 등이다.

촘촘한 규제로 신탁업무를 하는 은행·증권·보험사의 영업전략은 천편일률적이었다. 특정금전신탁(MMT)에 넣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자산으로 운용하거나 정기예금형 금전신탁에 넣어두는 게 대부분이었다.

금융위는 미국 일본 등 선진국처럼 신탁업 진입 문턱을 낮추고 운용 범위를 대폭 확대하기로 했다. 먼저 병원, 로펌 등 비(非)금융회사의 신탁업 진출을 허용한다. 예컨대 증여·상속 관련 법률자문에 강점이 있는 로펌은 유언신탁전문회사가 될 수 있게 인허가를 내주겠다는 의미다. 병원도 치매요양 전문, 암 등 중증질환 치료 전문 신탁병원으로 허가받을 수 있다. 은행, 증권사가 아닌 자산유동화전문회사나 부실채권관리회사가 신탁업에 뛰어들 수도 있다.

◆다양한 신탁상품 나온다

당장 올해 말 법 개정이 이뤄지면 새로운 형태의 신탁상품이 시장에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대표적인 게 생전신탁(유언대용신탁)이다. 금융소비자가 자신의 재산을 맡기면 신탁회사가 생전엔 본인을 위해, 사후에는 자녀·배우자를 위해 재산을 운용하고 수익을 지급하는 상품이다. 지금도 생전신탁을 판매하는 곳은 있지만 수요는 거의 없다. 앞으로는 자산 외에 부채까지 생전신탁으로 맡길 수 있게 돼 수요가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예를 들어 신탁가입자가 본인 아파트와 주택담보대출, 퇴직금을 포함한 전 재산을 생전신탁으로 맡기면 신탁사업자가 자산을 관리·운용하면서 가입자 사망 이후엔 대출금을 갚아주는 상품도 나올 수 있다.

생명보험청구권 유언신탁도 주목되는 상품이다. 지금은 보험청구권은 신탁 대상이 아니지만 앞으로는 유언신탁을 통해 보험금을 받을 권리를 자녀들에게 안정적으로 넘겨줄 수 있다. 신탁가입자 사후에 자녀가 미성년자일 때는 보험금 중 일부를 생활비로 주다가 성년이 된 뒤 목돈으로 지급하는 등 재산관리를 신탁회사가 알아서 해주는 서비스다.

금융위 관계자는 “신탁업 개편안의 세부 그림은 오는 6월까지 태스크포스(TF)를 운영해 마련한 뒤 10월 정기국회에 관련 법 제정안을 제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태명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