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잘 구성된 소설을 보는 기분입니다.” 지난 7월20일 정부세종청사 공정거래위원회 심판정. 퀄컴의 특허권 ‘갑질’ 혐의에 대해 공정위가 2년 넘게 조사해온 결과를 놓고 첫 전원회의가 열렸다. 회의 시작과 동시에 퀄컴 법무대리를 맡은 임영철 변호사가 선공을 펼쳤다. 그는 “개연성으로 이뤄지는 소설과 달리 제재를 위해선 논리와 증거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공정위 조사 결과를 ‘허구’라고 평가절하했다. 공정위 요직 출신인 임 변호사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까지 거론하며 공정위를 압박했다. 전원회의는 이후에도 네 차례 더 열렸다. 퀄컴은 그때마다 총력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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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퀄컴에 사상 최대 1조 과징금] '특허 독점·끼워팔기' 퀄컴에 철퇴…애플·인텔도 공정위 편들어
공정위의 주장에는 ‘억측’ ‘막연한 추론’ 등의 수사를 동원해 비난했다. 이유는 있다. 공정위가 세계 경쟁당국 중 처음으로 퀄컴의 사업 모델에 칼을 겨눴기 때문이다. 여기서 밀리면 퀄컴은 존망 자체를 걱정해야 한다. 세계 경쟁당국이 공정위 심판 결과를 주시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퀄컴의 총력전은 당연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공정위가 증거와 증언에 입각해 제재 논리를 세운 데 비해 퀄컴은 감정적인 주장만 되풀이했다.

◆“퀄컴 배타적 산업생태계 구축”

퀄컴은 2·3·4세대 이동통신 표준필수특허(SEP)를 보유하고 있다. 스마트폰의 두뇌 역할을 하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등 통신칩셋을 생산한다. 대표 제품명은 스냅드래곤으로 삼성전자 등에 납품한다. 공정위의 주장은 명료했다. 공정거래법 위반 행위 세 가지를 계속 부각했다. 퀄컴이 △인텔 삼성전자 등 통신칩셋 경쟁사에 표준필수특허 라이선스를 주지 않았고 △통신칩셋 공급을 무기로 삼성전자 등 휴대폰사에 부당한 계약 체결을 강요했으며 △표준필수특허에 다른 특허를 끼워팔고 표준필수특허를 부여한 회사의 특허를 무상 사용했다는 것이다.

세 가지 행위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퀄컴을 세계 통신칩 시장의 ‘괴물’로 만들었다는 게 공정위 판단이다. ‘경쟁 칩셋업체 경쟁력 약화→퀄컴 공급량 확대→공급량 무기로 휴대폰 업체와 유리한 계약 체결→상대 특허 무상 사용→칩셋 경쟁력 강화→시장지배력 강화’로 연결된다는 논리다.

시장지배력을 키운 퀄컴은 스마트폰 가격의 5%를 로열티로 받는 폭리를 취할 수 있었다. 작년 국내 업체들이 퀄컴에 낸 특허수수료는 12억7300만달러(약 1조5000억원)다. 채규하 공정위 시장감시국장은 “퀄컴이 스스로 ‘배타적 수혜자’가 되는 폐쇄적인 산업생태계를 구축했다”고 설명했다.

◆부당계약 강요 안 했다는 퀄컴

퀄컴은 경쟁 통신칩셋 업체에 고의적으로 라이선스를 주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협상을 했지만 조건이 안 맞아 진척이 없었다는 것이다.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지 않은 경쟁사에 특허 공격을 감행한 적이 없다는 주장도 되풀이했다. 휴대폰 업체와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한 것은 “휴대폰 업체들이 원해서였다”는 주장을 폈다. 공급량을 무기로 부당한 계약을 강요했다는 지적에도 “공정위가 제시한 사례는 퀄컴과 전혀 무관하다”고 선을 그었다. 자신들이 납품하는 통신칩셋이 아니라 휴대폰 가격을 기준으로 로열티를 받는 것에 대해서도 ‘수십년간 이어진 관행’이라고 해명했다.

◆해외 업체들도 공정위 편

승패를 가른 것은 증언과 증거였다. 공정위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삼성전자 LG전자 등 국내 업체는 물론 미국 애플과 인텔, 대만 미디어텍 관계자들까지 심판정으로 날아왔다. 한 애플 본사 임원은 “퀄컴이 칩셋 공급을 무기로 부당한 라이선스 계약을 강요했다”며 “퀄컴의 요구를 거부하는 게 쉽지 않다”고 증언했다. 퀄컴 임원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누가 갑인지 생각해보라”고 반박했지만 뚜렷한 증거를 못 내놨다.

전원회의 상임·비상임 위원들도 회의가 진행될수록 공정위 쪽으로 기울었다. 퀄컴은 회심의 카드로 자진시정조치를 통해 제재를 면제받는 ‘동의 의결’을 신청했지만 공정위는 기각했다.

일각에서는 퀄컴에 대한 제재 결정이 자칫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움직임을 자극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한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